2008년 9월 7일
사 56:7 나의 사명
금주 말씀은 선교사님께서 해주신 관계로 내용은 없습니다.
이번 주 은혜의 말씀을 선포해 주신 필리핀선교사 황필환 목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 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8월31일
마21:18-22 삶의 변화를 이루는 기적
하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면서 시장하시었던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열매를 얻기 원했지만 열매가 없으므로 그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 나무가 시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여러분 모두 무화과의 열매를 먹어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참 맛있지요 목사님께 맛없는 것이 뭐있습니까 하실분이 계실지 몰라도 여하튼 맛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먹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보통 5m 정도 높이로 자라는데 때로는 8m까지 다다르며 잎이 무성하여 태양 빛이 강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열매뿐 아니라 그늘을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보통 4월의 무화과는 열매부터 열리고 잎이 무성해 지는 것인데 이 나무는 비정상이었습니다.
차라리 잎이 피지 말거나 아니면 열매를 맺어야 했는데 잎만 무성하게 피고 열매는 없었기에 나무 구실을 못한 고로 주님께서 저주하신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거의 살리는 생명의 기사였으나 이번 기적은 심판을 예고하시는 냉엄한 기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이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의 심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나라 국화입니다 예로부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왕상4:25에 보면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 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다고 했습니다. 스가랴 3:10절에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는데 서로 초대할때는 열매가 풍성하기 때문이요 이는 곧 영적으로 큰 은혜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는 것은 유대민족의 심판을 예고해 주시는 교훈인 것입니다.
렘8: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심판의 경고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2.예수님은 열매를 요구하시는 분이시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에 열매가 없으니 존재의 의미가 없는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눅13:6-9에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간이나 그 나무에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하므로 찍어 버리겠다고 경고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3:10에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버리겠다고 하심은 존재 가치가 없는 무용지물은 그냥 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주셨건만 저들은 영접하지도 않았고 천국의 진리를 전해 주었건만 듣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외쳤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멸망 될 것을 경고한 교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열매 없는 인간,. 무용지물의 인간이 되면 언젠가는 주님께 찍히게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찍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요?
시쳇말로 친구들에게 찍히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찍히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남을수 있겠습니까? 앞길이 막힙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면에서, 열매가 없는 인간의 유형은? ...
(1)책임성이 없는 인간입니다 (2)회개가 없는 인간입니다 (3) 개선의 변화가 없는 인간
(4)매를 맞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 끊임없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해요
(5)의무를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무에 무관심한 사람
(6)신앙 생활한다고 하면서 믿음의 성장도 변화도 열매도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의 준엄한 책망을 면치못할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장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리에 내가 아직 머물러 있다면 회개하고 존재가치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3. 조물주의 기대에 맞도록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주님이 길가에 있는 나무를 찾아가 기대하고 요구하셨던 것은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주님의 기대와 요구에 응하지 못하고 어긋났기 때문에 말라 죽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기대가 있고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기대를 걸고 교육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과실을 많이 맺게 하려고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은 뜻은 열매를 기대하고 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잎이 아무리 무성해도 열매 하나와 비교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과 인생들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열매인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또한 직분이 높다고 해도 하나님의 요구에 맞도록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잎사귀뿐이고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진정 생존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요구에 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시간 우리 모두 자신을 성찰해 봅시다 나는 잎사귀만 무상한 신자인가? 열매가 있는 신자인가? 주의 일을 해도 소리만 요란하고 그 수고한 만큼의 결과가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작은 수고에도 아름답고 오묘한 열매가 맺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어떤일을 맡겨보면 큰수고 하고도 효과가 별로 없는 경우 종종 봄 (기도뒷바침.신앙인격)
오늘 본문의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는 그의 본분인 열매를 맺지 못하여 말라 죽었습니다. 나무의 본분은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여기 본분이라는 말은
*자기 구실을 다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책임을 수행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의무를 바로 감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 구실을 해야 참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기독신자면 다 신자가 아니라 신자 구실을 바로해야 참 신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전12:13-14)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본분,.. 신자의 본분과 의무를 바로 이행 감당하는데 참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의 본질이요 실속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사람이란 유명무실하게 살지 말고 무명유실하게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용이 없으면 외식이나 위선자가 되고 방해물이 되고 사회의 독버섯이 되기 쉽습니다.
*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유명무실 *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유명무실
* 되지도 못하고 된 척하는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성도로서의 갖추어야 할 신앙의 알맹이를 갖추고 살아야 할 것 입니다.
4. 열매가 없는 인간은 심판 하신다는 종말의 교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치는 꽃이 아름답거나 목재가 좋은데 있는것이 아니고 열매 맺는데 있는 것처럼 인간의 가치도 다른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는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 나무가 아무도 안보는 산중에 있는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길가에 있었습니다.
즉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오늘도 인간은 누구나 다 열매를 맺어야 하되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고 중요한 위치에 세움 받은 사람에게는 책임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자는 두 달란트를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나무 하나라도 자기역할을 못할 때 저주하셨는데 인간이 열매 없을때 어찌 그대로 둘수 있습니까?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뿐입니다. 요15:2에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비와 생산의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많은 희생을 하셨습니다. 이 희생의 보답을 우리는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니 또한 열매가 없을시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더욱 열매 맺기 위해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대에 어긋난 생활을 회개하고 주님의 요구에 맞도록 살아가며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생활을 청산하고 본분을 다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본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삶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5.무화과 비유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를 요구하시는 종말의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를지라도 이 세상의 종말의 확실성과 분명성을 인식하며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점검하며 준비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13:11∼12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권고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남은 생을 살아갑시다 종말의 확실성이 오늘 하루 나에게 어떠한 도전과 변화로 인도하고 있는가? .. 아무쪼록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맡은바 본분을 다하며 좋은 열매 복된 열매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8월24일
마20:29-34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신 믿음
오늘 본문은 여리고 성에서 예수님이 나오실 때 두 사람의 소경이 예수님을 향해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안수하고 고쳐주신 놀라운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 여리고 도성의 두 소경의 체험은 확실한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이 기적인 이유는 현대과학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소경의 병을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러자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소경이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몇 시간을 따라오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겼다"는 말은 Jesus had compassion "간절히 열망했다" "긍휼히 여기며 동정심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두 소경의 믿음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만 움직일 수 있으면 내 모든 문제는 그대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 34절을 보면 "저희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만진다는 말의 원어함토는 는 "불을 피운다"는 의미입니다. 눅8:33 즉 예수님의 손으로 만졌을때, 불이 피어나듯이 뜨거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소경들의 눈에 손을 대자마자 단번에 신적인 능력이 ,.. 치료의 불길이 역사하여 그들의 눈이 떠졌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보통 성도들은 "뜨겁다"는 말을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즌ㄴ 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고 은사를 체험하게 되면 육신적으로도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수하면 병도 낫습니다. 안수하면 불도 받고 안수하면 방언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암울한 현실 때문에 절망하지 마시고 육신적인 질병과 현실적인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참 믿음만 소유하시면 그 문제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해결해 주십니다.
믿음이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 있고, 그 믿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만 하면 기적은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두 소경에 눈에 손을 얹어 안수했을 때 곧 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 후 일주일이 지나자 눈에서 딱지가 떨어지면서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안수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치유의 체험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병마를 물리치는 능력을 가지신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말씀을 듣다가 감동을 받고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 예수님의 마음에 충격을 주기만 하면 소경이 눈을뜨게 된것처럼 기적을 체험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이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안고 있는 인생의 문제는 모두 나의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문제가 될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두 소경이 가지고 있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실 정도로 충격을 주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열정적인 믿음입니다.
두 소경의 믿음에는 열정이 들어있었습니다. 30절에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리 지르다"는 말 크라죠는 원래 격정적으로 소리를 지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소경의 고백은 격정에 넘쳐 울부짖는 뜨거운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꾸짖었고 말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주저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르짖은 것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열정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열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고 아우성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는 열정, 신앙의 불, 신앙의 열정, 신앙의 뜨거움을 맛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처럼/.....올림픽수영 8관왕 마이클펠프스의 포효)
오늘 신앙의 문제점은 신앙은 있으나 열정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외치지 않습니다. 생명있는 신앙은 박해 속에서 더욱 운동력을 나타내듯이 신앙은 운동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믿음속에는 불이 있어서 열정이 움직여야 합니다 열정이 식은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뜨거워야 합니다 기도도 . 봉사도 뜨거워야 합니다. 헌신도 뜨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정없는 신자들에게 라오디게아 교회를 비유하면서 뜨뜻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차지도 않은 자는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열정적인 신자를 좋아하십니다. 왕하19:31절에 "여호와의 열심히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원, 여러분의 축복, 여러분의 앞날의 모든일을 이루려는 열심을 가지고 지금도 움직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59:17에 "하나님은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선지자로 택하시고, 왜 바울을 사도로 택하셨습니까? 빌 3:6절이하를 보면 바울은 과거의 자신을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왕상 19:10절과 14절에서 엘리야는 열심히 특심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할 특, 매우 심 / 매우 열중함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니까 모두 미적지근한데 사울이라는 청년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핍박하는일에 보통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니까 "저 사람 바꾸어 놓기만 하면 그 열심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그 열심가지고 성경을 읽고 그 열심 가지고 구원하고 대단한 주의 일을 할 것 같다" 싶으셔서 다메섹 도상에서 뒤집어 놓으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화/ 하나님은 왜 깡패출신 부흥사들을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부흥을 이루었을까
김익두 이천석 이태희
벧전 3:13절을 보면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열심히 세상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열심히 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열심히 예수 믿으십시오. 열심히 뛰십시오. 우리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아서 움직이면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시려면 열정적으로 믿으십시오. 열정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듣는다는것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불입니다. 그래서 요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하시면서 말씀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은 불입니다. 불 옆에 가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피부가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불같은 말씀을 듣고도 감동이 전혀 없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실 정도로 충격을 주었던 믿음은 참된 영적인 지식이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에 덕/덕에 지식 /영적지식 영적인 지식이 믿음 안에 들어 있어야 합니다. 두 소경은 주님을 향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구주로 알았습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당신은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독립운동가나 혁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소경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실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버리시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에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알고 나를 아는 것, 이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알수 있습니다 요일2:20"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것을 아느니라 거룩하신 예수님께 성령의 기름을 부음받고 나면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학교를 못다닌 사람들도 예수 믿고 은혜받아 믿음이 생기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늘나라를 알게 되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성령 충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믿음을 주시고 믿음이 생기면 믿음 속에 있는 수직적인 지식, 하나님이 주신 지식, 신령한 지혜를 통하여 예수가 구주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구원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국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지식이 마음속에 생기면 그 지식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되고 사망과 생명을 분별하게 되고 하나님의 세계를 분별하여 하나님 편에만 서게 됩니다. 만약 여리고 도성의 두 소경이 예수가 구주임을 알지 못하였다면 그들은 예수를 찾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실 정도로 충격을 주었던 믿음은 분명한 소원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소경들을 향하여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분명히 대답 했습니다.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장사가 잘되기를 원하십니까? 승진하기 원하십니까? 병고치기를 원하십니까? 소원이 분명하면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 소경에게 눈뜨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그 소원을 들어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민망히 여기셔서 직접 창조적인 손을 얹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안에서 소원이 있는 곳에는 응답이 있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트레이드 밀/ 30분을 채우면 문제 해결/ 참게 되더라
제일 위태로운 신자는 세상말로 팔자가 편해서 별로 구할 것도 없고 집에 돈도 적당히 있고 좋은 차도 타고 남편도 잘 만나고 아이들도 쑥쑥커가고 편안하고 한가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환경이 좋아서 원하는 것이 다 있으니까 구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이것 저것을 구하다 보면 믿음이 독수리 날개 치는 것처럼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삶을 꾸려가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고 자기 삶을 새롭게 하고 더 확장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천식에 걸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호흡이 곤란해서 온 세상이 움츠러 들어 보입니다. 그는 숨쉴 공기를 찾아 구석으로 기어가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시 자유롭게 숨을 쉴수 있습니다. 그는 일어서서 손을 뻗어 구석에서 빠져나와 이 세상을 자류롭고 담대하게 활보합니다 이제 두려워하지않고 움직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시한번 자유롭게 숨쉴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소원을 세상 사람은 외면해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원이 크고 작은 것은 믿음의 분량입니다. 큰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지금 눈앞에 기도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의 기도들이 모두 이루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머물러 서서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신 분임을 표현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시간에도 머물러 서서라도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고야 지나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1)신앙의 열정을 가지십시오
2)영적인 지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소원을 가지십시오. 이 세가지로 뭉쳐진 온전한 믿음으로 응답받고 예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체험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8월17일
눅 17:11-19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지난 3일간 개최된 여름 어린이 성경캠프에 협력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아이들이 교회 뒷뜰 잔디밭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며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환경을 계속 만들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10명의 문둥병자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단순한 치명적인 육체의 질병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인간의 죄악을 대변하는 심히 부정한 질병으로 취급하여 문둥병자들을 특별 관리 하였습니다 당시 율법의 규정은 문둥병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성 밖에 거해야 했으며 사람들에게 가까이하거나 사람들과 섞여 살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밀어야 했으며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우고서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일반인이 문둥병자에게 접촉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부정한자로 취급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별 관리된 문둥병환자가 혹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에는 곧바로 사회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된 증거로 제사장 앞에서 자기의 몸을 보이고 제사장의 최종판단을 받은 후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기에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으로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 문둥이들은 주님께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왔으며 또한 예수께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제사장을 향해 갔을때 그들은 모두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11절과 12절의 말씀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갖었습니다. 그 문둥이들은 예수를 보면서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를 높여 예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들 중 아홉 사람은 감사의 말 한마디 없이 모두 흩어져 갔고 오직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왜 똑같은 상황에서 간절하게 치료되기를 바랐고 갈급하게 믿음으로 구했던 사람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사람들, 그리고 치료를 받았던 사람들 중 9명은 감사가 없었을까요? .. 그토록 절망적 상황에서,.. 삶의 소망이 없던 자리에서 치료가 되어 회복이 되었는데,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이마만한 이적을 체험하고 은혜를 받았으며 이 정도의 엄청난 복을 받기에는 쉽지 않을만큼 큰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없었을까요?
1.9명의 문등병자들은,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나머지 베푸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문둥병으로 가족과 직장을 떠나게 되고, 사업을 포기하게 되어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했을때 이들에게는 절망과 고통만이 그리고 원망만이 있었습니다 왜 나인가? 이 문등병만 아니었으면 이 병만 나을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둥병도 고치신다더라. 그들에게 예수님은 소망이었습니다. 절망적인 현 상황에서 탈출할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신을 했다.
예수님이면 우리를 고칠 수 있다. 예수님께 나가자. 그리고 간절히 구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나가 치료를 받았고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특별한 의미가 없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받은 이상 그들에게 예수님은 필요가 없었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는 깊이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고 주님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방법 혹은 과정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해결되자 주님에 대한 간절함과 간구는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자신에게 임한 기적은 주님이 베풀어주신 큰 은혜임을 인식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릴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향한 간절함과 간구, 믿음의 순종 등이 있으나 감사가 없는것은 간절한 간구, 순종들이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혹은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목적이기에 주님을 향한 감사가 없는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며 역사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들,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 했던 일들을 응답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는가?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는가?
2.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에 마음을 빼앗겨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에게는 이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것은 일생에 가장 큰복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감격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임한 이복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치료됨으로 누리게 될 복들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이제는 꿈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수 있게 되었고 잃었던 직장, 사업 등 사회 활동을 회복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날수 있었고, 더 이상 손가락질과 놀림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사회에 환원하게 되었고, 신분이 보장받게 되었다.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 사실이 그들을 환호하게 했고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에게 임한 은혜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은혜를 주신 주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너희가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에 내가 너희에게 준 복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 풍요로운 복들이 마음을 사로잡음으로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로움앞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8:11-19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 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셨지만 호13:6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9명의 문둥병자는 그들에게 임한 그 큰 은혜와 복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는 중요한 것들을 놓쳐 버리고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들, 그것에 마음을 두고 그 복을 주신 주님은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는지요? 주님이 주신 복들, 좋은 남편과, 아내, 귀한 자녀들, 주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로 얻은 학식과 지위, 주님이 주신 건강으로 얻은 명예와 물질 등 우리는 바로 그것을 보면서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 모습을 보면서 그윽히 자랑스러워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가 받은 복이 주님이 주신 복 일줄 잊어버리고 감사를 잊어버리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 앞에 엎드려 사례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가? 아니면 주신 복에 마음을 빼앗겨 그곳에 마음과 시간을 주고 그것으로 기뻐하며 자랑하는 자리에 있으신지요?
3. 아홉명의 문둥병자는 행동이 없었기에 감사와 더 큰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도 마음으로는 감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물으면 주님이 고쳐 주셨다고 말하며 참 감사한 일이라고 했을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으로 달려오는 행동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를 마음으로만 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주님께 달려와서 엎드리며 사례하며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마음의 영역에 머물러서만은 안 됩니다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서 행동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말로만 감사해서도 안되고 마음으로만 감사해서도 안됩니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무수한 고생 끝에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고 재무부장관이 되고 10대 재벌이 되고 YMCA 창설자가 된 존 와나 메이커는 아주 오래전 100만$의 예배당을 짓고 낙성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애들이 줄을 서서 추수감사예물을 제단에 바치는데 나는 너무 가난하여서 빈손으로 온 것이 너무 괴로워 주일학교 시간이 끝나자마자 벽돌을 굽는 아버지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벽돌이라도 한 수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목사관을 찾아 갔습니다.
당시 짐버드 목사는 내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여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30 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단독으로 100 만 불의 예배당을 짓게 되니 이 큰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 감사는 몸으로, 물질로,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인식한 성도이며 그들이 실제적인 복을 받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하고난 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즉 영혼구원까지 받게 되는 더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 행동으로 감사드림으로 진정한 감사를 드리시고 그리고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더 큰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시간 주님이 물으십니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복을주신 주님께서 묻습니다 지금까지 네 문제에만 급급하여 기도하고 순종하며 응답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응답을 하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또 구하고 얻기 위해 순종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주신 응답과, 베푸신 은혜를 깊이 인식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복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그것이 내 노력과 실력으로 얻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자랑하며 자긍하며 흐믓해 하고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지금의 복이 부모의 덕이나 우연히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여러분은 진정 행동으로 감사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마음으로만, 말로만 감사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감사를 드리러 찾아온 사마리의 문등이처럼 구체적으로 감사를 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주님의 물음 앞에 매 순간마다 감사의 믿음과 행동으로 답을 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8월10일
요11:39-46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오늘 말씀은 죽은지 나흘째가 되는 나사로를 예수께서 무덤에서 살린 기적으로 신약의 4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 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최대의 이적중 하나입니다.  육체의 부활은 생에 대한 승리요 부활은 생명의 기쁨입니다 오늘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죽음이라는 단어 를 떠올리게 될때
1. 우리 인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에 배우고 알아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것은 꼭 알고 지내야 합니다.
1)죽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전3:2에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하였으며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 것은 아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만인에게 있는 것처럼 죽음도 만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거절하거나, 피하거나, 연기 하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수천년 인류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죽음에 대하! 여 조 그러므로 인생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내야 할 것입니다.
2)영벌의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7:13에서 멸망의 문이 있고 생명의 문이 있다고 하셨는데 멸망의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자보다 지옥으로 갈자가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마 25장의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하여 악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눅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도 불신자와 신자의 금세와 내세의 삶을 보여 주셨으니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고 불신하던 부자는 지옥불에 떨어졌습니다.
악인들이 당할 영벌의 장소는 "풀무 불"이라고(마13:42)하셨고 시140:10 "깊은 구덩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서 단절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마8:12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영벌의 세계는 "꺼지지 않는 불로인해 구더기도 죽지 않는곳"(막9:48) 으로 천국과 영원히 단절 될 세계입니다.
3)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영생의 세계 곧 찬국을 마19:28 "새 세상이라고" 하셨고 요14:2 "내 아버지의 집"이라 했습니다. 거기에서 신자들은 새 몸 곧 영생의 몸으로 살게됩니다 "썩지 아니하는 몸"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 "영광의 몸" 등과 같은 몸의 형태로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의 세계에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없다"고(계21:4)하셨습니다. 계21:23 "해와 달이 비췸이 쓸데 없으며 거기엔 밤이 없는 세계"입니다. 오직 무궁한 삶, 완성된 영화로운 삶, 거룩한 삶, 평화로운 삶, 만족과 충만의 삶, 빛나고 아름다운 삶만이 있을 따름 입니다. 내세 영광의 세계를 이 세상의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으며 또 표현 한다고해도 그 세계를 다 알거나 이해할 수가 없을것입니다.
2. 그러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단지 그와 만 관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예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한 교훈인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이 부활의 첫 열매라 하심과 같은 의미입니다.
1)나사로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
요11:25 "나! 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에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영과 육의 분리되는 자연적인 죽음에서 예수님은 그 육신을 살리실 수가 있습니다. 눅8:54-55에 예수께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모습을 보면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고"하신대로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육신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나사로를 살리심은 영의 부활이 있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육은 살고 영은 죽는 영적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을 살리신 분입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영이 죽은 육체는 산 송장 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도 못 듣고 구주의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도 못느끼고 영원한 미래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5: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들이 살아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나사로의 살아남은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과 육이 아울러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영원한 사망 곧 둘째 사망입니다. 계21: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또 다른 사망이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이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사망이 죽는 날이기도 합니다.
와싱턴은 죽으면서 "의사여 나는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천로역정 저자 번연은 죽으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 나는 주 우리 그리스도에게로 가노라 하나님께서 그의 복스러운 아들의 중보로 말미암아 나를 영접하시되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모인 곳으로 영접하시리라 그리고 거기서 영원토록 머물리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무디는 마지막 임종시에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영광이로다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도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하고 주 앞으로 갔습니다. 김활란 박사의 장례식 예화
4)나사로의 살아남은 재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또 마24:30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오실 그 시간은 알 수 없으나 다시 오시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영광의 주로 오시며 일면 심판의 주로 오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영광을 얻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복종치 않은자, 불신자에게는 벌로서 영원한 멸망이 있게 되며 충성된 자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마25:14 재림의 날은 신자에게는 소망의 날이요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3. 오늘 말씀은 신앙이 없이는 기적도 없다는 교훈입니다
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하셨습니다. 나사로 가정의 식구들은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 오면서도 예수의 능력이 강함을 믿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 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마르다는 미래 부활은 믿으나 현재 지금 부활은 못 믿는 신앙의 착오자 였습니다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믿음은 좋으나 현재의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은 더욱 귀한 것입니다. 오늘의 나의 믿음이 내일의 나의 삶을 결정지어 주는 것입니다 현재의 체험은 미래 체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잘 요5:28-29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면서도 그의 행하시는 권능의 표적을 믿지못했고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았지만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2)마르다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망했습니다.
27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며 바른 신앙 고백을 했지만 그러나 39절에는 벌써, 냄새가 난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현상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마르다는 지금까지 인본주의적 신앙에 젖어 있었습니다.
2)그녀는 예수를 사랑함으로 대접을 하되 물질적인 음식 대접에만 치중하였습니다(40절)
예수를 귀빈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면서도 그 동생 마리아로 인하여 예수를 원망하는 태도를 취했고 많은 일로 염려하였으나 가장 좋은 말씀 듣는 신령한 일을 택하지 못했습니! 다(41-42절).
3)그런데 이러한 인본주의 적 신앙과 신앙착오의 믿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강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는데 이는 25-26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신 말씀을 그에게 기억시키면서 그의 믿음을 보강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강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계시된 말씀은 곧 성경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은 성경 내용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보강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것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신앙을 수정 보강하면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4. 예수안에 있는 생명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라는 말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신앙인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사는 생명입니다 나사로란 한 청년의 생명은 예수를 믿는 자의 생명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었던 나사로의 생명이 부활이요, 진리요 ,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음성과 접했을 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겔37:1-10의 말씀대로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아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여호와의 말씀이 접했을 때야 살아날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의 피로 사신 생명이기에 가치 있고 값비싼 생명이며 버릴수 없는 생명이 되므로 그의 생명은 죽으나 사나 살아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아멘.
예수님은 부활이시오 생명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나사로의 살아난 것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이제 우리는 다시 죽음이 없는 부활로 살아난다는 것을 믿고 소망 중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이 땅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8월 3일
눅13:10-17 진정한 안식을 얻으라
 
은혜 가운데 2008 가족수련회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것은 수련회에 참석치 못하신 분들이 주일예배에 불참케 됨이 앞으로는 가족수련회를 어떻게 치를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안식일 날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때마침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녀가 요구하지도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은혜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는 오직 주님만 베푸시는 능력이요 그만 가지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18년간 고생한 이 여인을 고치고 나니 그곳의 회당장이 이를 못 마땅히 여기면서 왜 안식일을 거역하느냐고 질책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주님이 "이는 아브라함의 딸인고로 고치어야 하며 나는 의료행위가 아니고 마치 너희들이 안식일날 소나 나귀를 기갈을 면하기 위해 물을 먹이는 것과 같이 이 여인은 짐승들의 기갈과는 비교가 아니되는 18년간 장기간 고생한 자이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 하시며 참 안식일을 지키는 교훈까지 하신 기사입니다.
1. 이 여인은 신체적으로 동정을 받을 만한 처지였습니다.
이 여인은 18년간 귀신에 붙들려 허리를 피지도 못하고 구부러진 상태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지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생활하기가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며 살아온 세월 이었습니다.
이 같은 처지를 잘 아신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 그를 그냥 돌려보내시지를 아니하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 여인은 예수의 원수인 마귀로 부터 이같은 불행을 받고 있으니 더욱더 동정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여인의 신앙을 보아서라도 동정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병이 장기화 되면 실망하고 낙망하여 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주를 떠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초기 증세에는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가 있다고 하며 기도하고 이 시험을 이기어야 된다고 하다가 좀처럼 낫지 아니하면 기도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도 없어지고 의술에만 의존합니다. 그래도 고치지 못하면 생을 포기하고 나날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떠한 심적 동요 없이 주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로 부터 동정을 받아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기다림이 정말 필요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병자의 기다림. 성전미문의 앉은뱅이의 기다림 / 끈기
2. 이 여인은 예배의 참예심이 대단한 신앙자 였습니다.
허리를 피지 못하는 불구가 된 육체로 여인은 회당에 모이는 예배시간만은 늘 빠지지 아니하고 꼭 참예한 신앙의 소유자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구의 몸으로 18년간 교회를 출입했지만 신의 도움도 얻지 못하고 세인들로부터 비난도 받으며, 신앙 생활하기엔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세상인 들이 바라는 육적 만족보다 자기가 믿고 있는 신관과 미래의 소망만 가지고 실망 없이 성전을 출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처지에 있다면 교회에 빠지지 아니하고 나갈 수 있는 신앙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만족스러운 일이 없어도 여인과 같이 신앙에 열의를 가져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에는 생명을 내걸고 지키라/ 윤중섭목사 의 사세청장 반문으로 인한 주일 예배 불출석 염려에 대한 간증 /한번이 문제/마귀는 연속공격
3. 타락한 모든 인간의 영적 상태를 묘사해 준 기사입니다.
꼬부라져 있는 상태는 죄악에 빠진 상태로 하나님의 얼굴조차 올려다 볼 수 없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시40:12)에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사람들의 대개의 생활을 보면 자기들의 생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 매여 자유로운 몸이 못되고 속박적 생활을 하는 것을 봅니다.
본문의 여인은 꼬부라진 상태를 헤어나지 못하고 그 고통이 18년간이나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환자는 예수를 만나서 그 고통이 제거되고 새로운 삶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환경은 어떠한가요. 이 환자처럼 꼬부라진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면 오늘 예수 만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자유로운 생활, 고통이 없는 평안과 기쁨의 생애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11절을 주의 해서 묵상해 보십시요 "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 혹 지금까지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는것, 지긋지긋한 가난에 억매어 사는것 등등이 혹 사단의 묶임으로 인한 장난이 아닌가? 만약 사실이라면 이겨야 합니다 ?아야 합니다.  특별히 마음의 꼬부라짐에서 벗어나라
4. 예수를 믿어도 불행은 계속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을 보시고 이는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후손. 축복의 자녀, 그런데도 18년 동안 고생 했습니다.
1)욥은 마귀의 시험으로 자기의 질병은 고사하고 자녀들의 생명 재산의 손실 부인의 배척 친구들의 조롱 등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2)(눅16:19-31) 거지 나사로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는데 죽는날 까지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며 살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백성들이 때로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연단을 통하여 온전케 하기 위해서(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는 까닭에(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였으니 /주마가편
*하나님의 은혜주심을 더 깨닫게 하기위해서 아픈 만큼 성숙하다/아파본사람 아픈자/봉사할수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휴가 차 뉴욕 방문중에 백도현권사/ 사명자 의 길로 들어섬 / 하나님의 깊은 섭리는아무도 모름 다만 순종의 차원에서 이해되는것임
*세상이 약하기 때문에 의인도 괴로움을 당함
5. 이날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이같은 은혜를 입지 못할 뻔한 것임
18년 동안을 귀신들린 이 여인은 어느날 강한 경련을 일으켜 꼬부라져 있었으며 조금도 피지 못하는 병신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러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마다 성전에 나왔다는 것이 이병을 고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은 명심하여 들어야 할 말씀이요 또한 이 여인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가운데 공 예배에 참석을 소흘히 하는 자가 있습니다. 성도여 이 불구자처럼 언제나 예배에 참예하여 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같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6.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 안식일에 축복을 베푸시는 것을 본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날 병고치시는 것을 불법이라고 질책하면서 다시는 이같은 일을 하지 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의 소행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주일날에도 소나 말을 끌어다가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한데 나도 이 아브라함의 딸의 육신을 위한 나의 능력을 공급해야 한다"고 하신 뜻으로 그를 치료 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 짐승이 아니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녀이니 그녀를 치료해 주는것은 당연하다고 하신것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무엇보다도 많이 사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7. 안식일은 기쁨을 얻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17절에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여인을 절망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기쁨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본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질병, 모든 고통, 모든 근심에서 해방되어 기쁨을 얻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오늘의 주일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통하여 사탄에 얽매인 죄의 사슬을 끊고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진정한 안식,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사탄의 구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안식과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 의식으로 인해 우리가 하늘의 기쁨을 얻는데 방해를 받아서는 아니 될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로 부터 치료를 받은 여인은 어떻게 보면 그 꼬부라진 몸으로 회당에 출입만 했지 어떠한 예배의식도 없고, 또한 목적의식이 분명치 못한 가운데 회당 뜰만 밟고 다닌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날도 예수님이 계셔도 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께서 먼저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는 이 여인과 같이 목적 없이 교회에 다니지 말고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께 모든 소원을 구하여 축복을 받아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찾으면 이 여인처럼 하지 못 한 것 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7월27일
요 9:1-12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지난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가족수련회가 오늘 주일 예배로 마쳐지게 됩니다
지난 말씀들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면 첫째날 저녁에는 야곱의 깨어짐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면서 야곱의 거짓과 간사함을 깨뜨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야곱보다 더 사기꾼인 라반을 예비하여 놓으셨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당한 사건 우리가 만나는 사람 나를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사람, 사건인지 살펴보자는 말씀을 드렸으며 어제 저녁에는 가나안 땅은 저절로의 축복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음이 있어야만 농시를 지을수 있는 땅이기에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땅이기에 좋은 땅임을 말씀 했습니다.
오늘은 함께 읽은 말씀속에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제목으로 말ㅆ므을 전하고 자합니다.
한국에서 개봉되었던 "낮은 곳에 임하소서"란 영화 속의 실제 주인공인 소경 안요한 목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신앙을 떠나 세속의 생활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하루하루 재미있는 생활을 하였지만 1975년 그의 나이 37살이 되던해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상하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온 가족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 결국 아내와 이혼 후 지하철 계단에서 구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버려진 인간이라 생각하고 그날그날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목숨인데 어느 날 지나가는 나그네가 사업에 실패하여 한강에 가서 자살하려고 하다가 걸인 안요한을 보고는 말하더랍니다 "당신 같은 소경이며 거지도 사는데 나라고 못살겠느냐?"고 하면서 용기를 얻고는 안요한의 손을 잡고 "당신 때문에 나는 자살하지 않기로 하였소" 하면서 고마워하더랍니다. 그때 그는 자기 같은 쓸모없는 인간도 이 세상에 살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자기가 소경이 된 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새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어느면으로 보나 보람 있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기 어려운 한 불쌍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일생동안 예루살렘거리 한쪽 모퉁이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불행한 사람이 제자들 간에 화제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의 죄이오니까, 그 부모이오니까?"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데 그 사람이 그대로 순종하자 곧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육신의 눈은 건강하지만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이 눈이 밝아야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듯이 천성을 향한 순례의 인생길에서도 영적인 눈을 밝게 떠야 낙오되지 않고 잘 찾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고침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어두웠던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새롭게 바라보는 은혜 충만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과거에 집착하는 옛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1-3절).
제자들이 소경을 만나 "이렇게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살면서 겪게 되는 불행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지은 죄에 대한 결과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기치 못한 재앙은 죄의 업보로 써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와 같이 나면서부터 불행을 타고났으면 그 불행 역시 누군가의 죄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상당하게 성서적 근거가 있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이나 고통은 죄로 말미암아 오기도 하고 부모의 죄로서 자손에 미친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의 죄로 근원이 되기도 하고 또한 병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성경 여러 곳에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 때 부터 소경된 이 불쌍한 사람에 대해서 아주 냉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소경을 대하는 그들은 아주 사색적인 눈초리와 배타적인 사고로 그를 취급했습니다.
그를 향한 뜨거운 동정심이나 불타는 사랑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지나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비참함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주님께서는 그 소경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3절)이라고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주어진 문제를 놓고서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따지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 급급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린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항상 과거에 얽매여 후회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죄의 원인과 책임을 따지는 모든 과거지사를 덮으시고 치유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것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과거로만 향하던 우리의 발걸음을 돌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여러가지 재난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일만 생각하고 한숨만 쉬면서 탄식하는 경우가 많습니! 다. 어찌해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우리 가정에 올 수가 있느냐고 넋두리하기에 바쁩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영어의 'think' 생각하다 와 'thank' 감사하다는 뜻이 전혀 다른 말이지만 같은 어간을 가지고 있다합니다 아마도 이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은 무엇이든지 깊이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고 또한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자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고 가르치시는데 우리도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찾으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만 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낳기도 전에 자기 죄 때문이거나 부모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으니까 한탄이나 하면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2.만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보게됩니다 (4-6절).
예수께서는 이상한 방법으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는데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성경에서 병자나 장애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은 여러가지 방법을 쓰셨습니다. 어떤 때는 손을 대시며 고쳐 주시고, 어떤 때는 말씀만 하시고, 또 어떤 때는 큰 소리로 명하시며 귀신을 쫓기도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또 새로운 방법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다양한 치유의 방법을 보면서 의아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치시는 방법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주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친절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될텐데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신 것은 그 불쌍한 자에게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 것 없이 보이더라도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손길이 아픈 환부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입니까?
우리 주님의 사랑은 너무 깊고 놀라운 것입니다.
방송광고 가운데 공익광고 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적으로 유익 내지는 계도하는 광고입니다. 광고중 배달소년이 던져넣은 신문이 높은 벽에 맞고 떨어지자 샐러리맨은 소년 대신 신문을 주워서 던져넣는다. ‘신문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혼잡한 건널목, 할머니를 부축해 드리며 건네는 인사, “할머님, 조심해서 가세요.”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23초’후배에게 커피를 타주며 하는 격려. “김대리 어제 야근했어? 쉬어가면서 해.”‘후배에게 커피 타주는 시간 27초’혼잡한 버스 안에서 내리려는 여학생이“잠시 만요”하자 나오는 자막. ‘버스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4초’그리고 엔딩 자막과 내레이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1분이면 충분합니다 6.23.27. 4
신학자 칼 바르트 교수는 성경의 진리를 한 마디로 결론 지은다면 "성경은 결국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보았네'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권세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험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 바로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어두운 영적인 눈에도 그의 침이 묻은 진흙을 발라주십니다. 이 시간 예수의 사랑의 침이 우리의 영혼에 흠뻑 젖도록 발라주시길 바랍니다.
3. 주님은 순종할 때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7-12절).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신 주님께서 이제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의 식수의 근원으로써 성전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저수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그 소경은 이런 시시한 짓이 어디 있느냐고 그만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연히 자기의 눈을 침으로 이긴 진흙으로 발라놓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한다고 귀찮아하며 짜증을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밝아져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빌2:5-8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기에 빌 2:9-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셨듯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모두가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절대 순종했습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순종할때는 복을 받았지만 불순종할 때는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특히 이 소경 거지에게는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기 때문에 씻으러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데도 마음이 강팍해져 더욱 불순종합니다. 더 곁길로 갑니다. 이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곁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즉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 받는 길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거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아니 영적인 소경이 되어 진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던 우리의 눈이 확 뜨여져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매일매일 감격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과거에 사로잡혀 환경과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구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 순종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을 고침 받고 우리도 광명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7월20일
창21:8~21 이스마엘의 회복
금주 말씀은 김홍일 선교사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선교사님 내외분게 감사 드립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7월13일
마17:24-27 왜 세금을 안내십니까?
하루는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반세겔을 내지 아니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반 세겔이란 당시 20세 이상의 이스라엘인의 남자 모두에게 부과된 성전 세로서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금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 된 것이었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 바쳐야 했으며 이 세금은 성전 창고에 보관했다가 성전 사업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세금을 주님이 내셨느냐고 물어 본 것입니다.
이들은 세금을 내냐 안내냐 하는 문제보다는 예수님은 성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의도로 즉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모략을 가지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목회자 세금제도 비교, 담임목사는 아름다운교회 SELF-IMPOLOYMENT TAX )
1. 예수님이 세금을 내신 이유는?
1)저희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7절 저희로 오해치 않게 하기 위하여..
원어/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다. 예수와 그 제자들이 성전세도 안내는 사람이라고 오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납부할 의무가 없으신 분입니다 성전세는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해받지 않도록 자진하여 납세를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오해가 있으면 미움이 옵니다 *불화가 생깁니다. *협조가 안됩니다 *사랑이 단절됩니다 *오해가 극심하면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인간들의 이같은 행동의 가능성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세금을 내신 것입니다 눅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것이 없을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오해케 하는 행동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2)예수님이 세금을 내신 이유는 의무를 다 하며 사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1)셋돈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거나 믿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국민의 한사람으로 보았으므로 국민이면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세 를 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표면적으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는 것을 옳게 여긴 것입니다. *국민은 국민의 의무를 * 공무원이면 공직의 의무를 * 사원이면 사원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이면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1)교회에서 헌금의 의무 : 구약의 성전 신약의 교회 유지를 위한 헌금 (출30:12 생명의 속전)
(2)사회에서 납세의 의무 : 국가 발전과 의무를 위해 국가의 국세를 내어야 합니다 (롬13:7)
(3)단체에서 회비의 의무: 교회나 사회단체에서의 회원된 의무를 다할 것이며 (롬15:1) 교회의 직분자이면 직분자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의무를 못하면 모든 자격에서 박탈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이 세금을 내신 것은 본이 되기 위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면에서는 성전 자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전세를 안내도 되지만 표면적으로는 유대 사회의 랍비며 지도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본이 되기 위해서 내신다는 뜻입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본을 보이신 예가 많이 있습니다.
(1)예수님은 세례를 안 받아도 되지만 죄인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2)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아야 하는데도 섬기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3)예수님의 기도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성을 가지신이가 기도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연약한 인간들에게는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교회의 봉사 생활에도 본이 되고 율법의 제도에도 본을 보여야 하며 사회에서의 공중도덕과 인간사의 윤리도덕을 지키는 데에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2. 순종 봉사자에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제자들의 세금을 주님이 내어 주시었습니다. "너는 한 세겔을 얻으리니 그것으로 나와 너 두사람을 위한 세금으로 가져다 내어라"하셨으니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베드로의 세금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와 함께 빛날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를 위하여 지불한 것이 그에게 베푼 주님의 호의였습니다.
Open its mouth and you will find a four dracma coin 낚시를 던지는 것은 베드로의 몫, 고기안에 동전이 있게하심은 주님의 기적
(성직자의 세금제도) 소득세 면제 사회보장세 납부 일을 하라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 자기의 밥벌이는 자기가 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의 관찰력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 속에 있는 고기 입에 돈이 들어 있는 것까지도 아신 예수님입니다. 이로 보아서 예수님은 사람의 가슴속과 머리속에 무엇이 들어 있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십니다.
1)나다나엘의 간사함이 없는 것을 아시었습니다 (요1:45).
빌립집사의 전도를 받아 예수 앞에 나올때에 "이때에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하니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2)과부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도 관찰하신 예수님이십니다(막12:41-44).
많은 사람들이 연보를 하는데 어떤 자는 많은 액수로 헌금하고 어떤 자는 적당하게 하지만 여기 한 여인은 "두렙돈 곧 한 고드란트"을 헌금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 여인은 참으로 헌금을 많이 했다고 극찬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칭찬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할 때에 주님은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임의로 하였지만 이 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같이 주님의 관찰은 많은 사람들의 헌금하는 것까지 보신 것입니다.
야러분의 헌금 생활은 어떻습니까? 준비하여 드리라 정성으로 드리라 . 교회에 와서 체크 쓰지 말라
3)한 여인이 군중속에서 자기에 옷자락을 만진 것도 관찰하신 예수님이십니다(막5:25-34).
12년간 혈류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자기의 불치병이 낫겠다는 믿음이 생기어 손을 댄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 사실을 아시고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고 하시니 제자들은 "지금 우리의 일행이 많아서 서로 부딪쳐서 잘못 손을 댄것 같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찰은 한 여인이 고의로 행한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 여인은 예수님이 벌써 자기의 행위를 알고 계심을 짐작하고 그 앞에서 떨며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은혜를 입어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소원을 알고 계신다 나의 상처 받은 심령을 알고 계신다 나의 병든 몸을 알고 계신다 구하라 만지라
4. 이는 물질관이 분명하라는 뜻입니다.
신안생활하면서 물질관이 분명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질은 제2의 생명 , 인격척도
1)(마22:15-22)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세금에 관한 질문을 할 적에 이에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국민의 의무인 국세는 나라에 내고 하나님께 드릴 헌금은 감사함으로 드리라는 뜻입니다. (십일조와 헌물)
2)(눅19:4)에 삭개오는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고"예수님 앞에 맹세를 했습니다 삭개오는 세금을 거두어 드리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세금을 거두던 자이므로 혹시나 세금을 거두다가 잘못 계산해서 부정이 되었다면 그 액수에 사배나 갚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물질관이 분명해야 함을 잘 묘사한 기사이기도 합니다.(출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 찌니라"고 했습니다.
3)수7:22-26에 아간이 전쟁터에 나가서 노획한 물건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간은 전쟁터에서 노획한 물건 중 외투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덩이 얼마를 감추어 두었다가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알고서 공개하므로 그는 그 죄 값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부터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4)행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물질관이 분명하지 못해서 멸망 받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자기의 전 소유를 팔아 헌금한다하고서 이중 절반은 감추어 두고 절반만 헌금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우리는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바치라고 명한 십일조 헌금도 꼭 바쳐야 영과 육이 살게 될 것입니다. 영과 육이 사는 길은 바로 물질관이 분명한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저희로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성전세를 주도록 베드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와 구속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쓸데 없는 오해와 충동을 피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지혜롭고 덕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넓은 아량과 양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세리에게 쓸데 없는 오해와 충돌을 피하여 거룩한 사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양보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다 같은 죄인들이 하찮은 일에도 사소한 감정을 가지고 쓸데없는 오해와 충돌을 불러 일으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가정과 국가에 해가 되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나의 작은 양보와 희생 그리고 관용만 있으면 잘 해결 될 일을 나의 고집과 혈기로 주장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화를 초래하는 일들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양보하시면서 복음전파와 구속사업 성취에 충성을 다하신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고 나의 고집을 양보하며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주님의 사랑을 성취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움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7월 6일
막9:14-29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마가복음9장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장면은 지난 두주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던 산 위에서의 예수님의 변화의 장면이고 한 장면은 산 밑의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간 산 위에서는 예수님의 변화되어진 모습으로 인한 은혜의 장면이었으나 산 밑에서는 남은 제자 아홉명이 비난을 받고 있는 비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제자들은 좀 더 신중하게 예수님이 내려 오실때까지 환자를 대기 시켜 놓아도 좋았을 터인데 아마도 서로 먼저 자기가 고치겠다고 나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은 막9:6-7절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둘씩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귀신을 내 쫓았으며 병도고치는 능력을 행사 했습니다 불과 며칠전의 경험이었기에 오늘도 할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덤벼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지금은 두사람씩 파송할때와는 달리 아홉명이나 되니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호령 했습니다... 이때 귀신이 나가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자들은 열심히 소리를 질렀지만 결과는 형편없이 실패 했습니다.
주위에 섰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그들은 스스로 놀라며 초조해 지고 초라해 졌을 것입니다. 그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난처하고 실의에 빠진 순간 이었겠습니까? 이제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듣고 저들의 불신을 책망하시면서 귀신을 내어 쫓으십니다. 때론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나타날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 다니는것 사람들이 다 압니다 직분자임을 다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저들이 우리에게 영적 도움을 요청할때도 있습니다.  그때 나타나는 우리들의 모습들의 예화
여기서 제자들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하나는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귀신이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이름으로 안되는 것입니까?
2)또 하나는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입니다 지난날과 똑같은 방법으로 시도 했는데 그때는 되었던 일이 오늘은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왜 안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서 그들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심각하게 물어봅니다 28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종용히 묻자오되.. (헬)이디안 에페로톤 Private Question One's own 개인의 사사로운 , 뚜렷한 His disciples asked him privately (푸라이버시)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때로는 종용함이 정말로 필요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18:4 내가 나의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도다/ 감찰/ 빛을 비추다
격동하는 마음이나 급한 생각이나 자기 명예만을 앞세우거나 남의 평판에 신경을 쓰다보면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또한 자기 체면이나 욕심을 챙기거나 초조하게 굴면 바른 능력을 행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종용히 묻고 있는 것입니다.  Why couldn't we drive it out?.... 그들은 벌써 하나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아이의 아버지가 나의 믿음이 없는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소리 지를 때에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 믿음을 도와서 어린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도 19절에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믿음이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것이 없느니라 하신 무서운 선언을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것의 결국은 믿음이 문제임을 알았으므로 이제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믿음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1.산 밑의 제자들은 믿음을 지식으로 오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별개입니다. 추상적인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나 수긍이 믿음이 아닙니다. 특별히 오래 믿었던 사람들이 이런 타성과 착각에 빠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좀 알고 상식적인 신학적 지식을 가진 것이 곧 믿음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별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막16:2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신앙 경력과 믿음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을 하신후 막10:31 먼저 된자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자가 많으니라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때로는 처음 믿는 사람이 아주 순수해서 오히려 깨끗한 믿음으로 승리할수 있습니다. 담배는 처음 믿을 때 끊어야지 /성경을 알면 담배 피지 말라는 성경 말씀이 어디 있냐?
오랫동안 종교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타성화 되어 알맹이가 없는 형식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이 있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영국의 부흥전도자 웨슬레가 미주 인디안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받아 미국으로 가던중 바다 한가운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함께 타고있던 독일의 경건파 기독교도들인 모라비안 교도들은 뜨겁게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그때 그들은 당신 예수 믿습니까? 나는 선교사입니다 선교사가 왜두려워 합니까? 정인찬목사님의 간증/한신대학교교수 신학대학원생/시험치를때/성령 받으셨나요?
내가 지금 신학교 교수라는 사실이 나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또한 나의 직분과 믿음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의 신앙적인 경험이나 실적과, 신앙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서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내가 남을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믿음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선행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의 실적이 곧 믿음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의 경력과 오늘의 내 믿음을 동일 시 하지 말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감리교회 신학 /칭의 성화 완전 성화
3.믿음은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제자들은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엡2:8에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이 믿음을 우리는 잘 관리 해야 합니다. 선물은 잘 관리하고 간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리기가 십상입니다. 그저 한번 받았으니 있으려니하고 무관심 하다보면 잊어 버린지가 벌써 옛날입니다. 그리고 껍데기인 형식만 남았고 의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건을 만나면
언제 믿었는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럴수가 없을 정도로 흔들려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실수를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보게됩니다 .믿음과 은사는 잘 관리해서 내게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든지 소흘하게 하면 은사는 잃어버린다거나 빼앗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개인간증/ 찬양의 은사/목이 계속아픔 (2년고생)잘 보관 하지도 않는 필요 없는 은사를 왜 계속적으로 주시겠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주어졌고 또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이 은혜의 선물을 잘 관리하고 키워야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감사와 순종입니다.. 예수 믿게 된 사실에 감사하고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리고 순종해 나갈 때 이 은사를 지켜 나갈 수 가 있는 것이지요 (삼손의 승리의 비결과 실패의 원인분석 삿14:6 19, 15:14 여호와의신이)
4. 믿음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믿음을 잃게 됩니다
고전4:19-20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자의 말을 알아 볼것이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알고 있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믿음이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없었고 귀신을 이길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음을 회복할수 있겠습니까? 29절을 함께 읽읍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기도외에 다른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기도함으로 나를 알고 기도함으로 나의 믿음을 알아서 믿음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가장 큰 실수는 기도를 포기하는것 신앙인의 가장 큰 범죄는 기도를 방해 하는것 저는 지난 금요일 새벽에는 교회당이 기도하는 분들로 가득찰줄 알았습니다 저녁기도회로 모이지 않기에 또 휴일이기에.... 기대카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더군요
스콧틀란드의 개혁자 존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 안하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데 그중에 눈먼 아이가 함께 연을 날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도 신통해서 "예야 너는 연을 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연을 날리니" 물어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기를 연줄을 잡아 당겨보면 연이 잘 나는지를 알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는 하나님을 볼수는 없지만 기도의 줄을 한번 당겨 보십시오 끊어진지 오래 된것도 모르고 착각속에 살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수 없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어제까지 기도했다고 오늘은 기도 없이 될 것 같습니까? 어제 능력을 행사했다고 그 능력이 오늘까지 그대로 있을것 같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인 관계는 기도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 없이 듣고 기도 없이 생각하고 기도 없이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실수가 연발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실수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이유는 바로 기도 때문 이었습니다 나의 무능은 불신 때문이요 불신은 기도가 없어서 입니다.  또한 기도를 했으나 능력이 없음은 기도의 바른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말씀을 찾아 봅시다
사45:1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영적 호흡이요 기도는 영적 노동입니다. 아무쪼록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쉬지말고 기도하여 귀신을 이기고 능력을 행사하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움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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