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4일
창25:19-34 성공한 결혼 과 실패한 자녀교육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우리 교회가 어린이들을 위한 좋은 교육시설을 갖추고 또 영성이 풍부한 교사들을 중심으로 나날이 은혜로운 신앙 교육이 이루어짐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수고하시는 교사들에게 주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 하고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일 것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제외 한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업이 어려움을 당하고 직장에 문제가 생겨도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참으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와 같은 것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도 자녀에 문제가 생기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녀의 문제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중요한 자녀를 문제없이 키운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과 가정에 자녀로 인한 갈등과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많은 가정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두 아들 에서와 야곱입니다. 창세기 25장에서 마지막 절까지를 살펴보면, 이삭과 리브가의 자녀교육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먼 거리에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거리와 신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를 통하여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가정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 이 두 자녀의 양육이 별로 신통치 않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결혼에는 성공했으나 자녀교육에는 실패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있어서 20년 만에 간절한 기도로 얻은 아들들이었습니다. 리브가가 40세에 결혼을 해서 60세에 처음 자식을 낳게 된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결실로 얻어진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교육이 맘먹은 대로 쉽게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 에서를 보십시오. 그는 분별력도 없고 인내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들판에서 돌아온 에서는 동생 야곱이 끓여놓은 팥죽에 구미가 당겼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픈 그는 장자의 명분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면서 팥죽 한 그릇에 자기의 명예와 권한을 버렸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고사상어에 나오는 소탐대실 이지요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도덕률과 윤리성을 다 내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맘에 원하는 헷족속 브에리의 딸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함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매우 섭섭해 하고 근심하는 것을 보고도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이라는 여자를 또 얻습니다 에서는 도덕관도 없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축복을 가로챘다는 한 가지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복수심에 불타던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도 절제할 줄 모르고 성적인 욕망도 제어하지 못하고 감정적인 느낌도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간교한 사람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 먼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별미를 제공하면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던 간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형 에서를 닮아서 비윤리적인 생활을 답습하여 네 명의 아내의 남편이 되는 육적인 존재로 전락을 합니다. 두 사람은 융화할 줄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라 미워하고 증오하며 서로의 감정을 따라서 시기 질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 부모의 양육 방법에 큰 영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가에 따라 비열한 인간도 되고 신령한 인간도 될 수 있고, 자녀다운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자녀답지 못한 자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우리의 모든 자녀는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귀한 귀중품을 잠시 맡기면 얼마나 관리를 잘해야합니까 자나깨나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러보라고 맡겨주신 자녀를 우리가 소홀히 해서 망친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잘못된 양육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양육의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직임을 말하는것 아닙니까?
이삭과 리브가의 자녀양육의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두 가지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자녀양육의 시발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녀들의 개성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24절 이하를 보면 해산 기한이 다 되어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 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외모는 물론 성격도 정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삶의 방법도 전혀 달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서로 다른 개성의 면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과 리브가는 이 점을 간과했습니다. 자녀들의 개성이 얼마나 다릅니까.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관심분야, 행동습관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과 리브가처럼 고정관념을 갖고서 편애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 때에 개성을 따라 , 종류를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개성을 존중할 때 인간관계도 제대로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개성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하는 자녀의 양육은 무엇으로 양육됩니까? 사랑의 올바른 분배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28절을 보면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기는 했는데 자식에 대해 편애가 지나쳤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가페 사랑! 여러분 다 잘 아시지요 얼마나 우리가 많이 배웠습니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 죽어 머땅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는 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삭과 리브가 그들의 사랑은 치우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왜 사랑했을까요? (1)자기 중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2)물질 중심의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많이 사냥하므로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야곱이 얼마나 상처가 많겠습니까? 리브가는 그런 야곱을 불쌍히 여겨 모성본능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감정적인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3절 후반절에“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어린 두 생명이 들어있을 때 야곱이 에서보다 훌륭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씩씩하고 듬직하고 활동적이고 사회성이 강한 에서가 듬직해 보이고 매일 어머니 곁에서 집안에만 있는 야곱은 정말 볼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편애하기 시작하니까 이런 편애의 정신이 그 아이들에게까지 깊이 전달되었습니다.
자식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고 믿음이 들어가면 부모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신해 세우신 대리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공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편애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면 안됩니다 사랑을 골고루 베풀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려면 신앙이 바로서야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믿음으로라야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녀는 믿음안에서 생기는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믿음으로 양육하되 무엇보다 기도와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가르쳤다고 합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기네스북은 세계 제일 가는 이야기들, 또는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일리노이주에 다부라고 하는 사람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합니다. 오른 이유가 무엇이냐, 57년동안 주일학교를 개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57년 동안 믿음 생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다부라고 하는 사람은 57년동안 주일학교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하면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1932년 이 다브씨가 은퇴 겸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잔치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다브씨는 네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 통은 중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에게 온 편지였습니다. 또 한 통은 미 연방은행의 총재에게서 온 편지였고, 또 한 통의 편지는 후버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편지였으며, 마지막 네 번째 편지 는 후버 대통령 자신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 선교사 연방은행총재 대총령비서실장 대통령 오늘의 미국 아니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주역 4인 입니다 어떻 연유일까요? 어느 날 이 다브 씨가 길을 가다가 길에서 놀고 있는 네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 그들은 전도해서 주일학교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그들이 훗날 미국을 이끌어 가는,...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귀한 일꾼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적인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마지막 하신말씀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는 말씀대로 우리의 자녀들과 자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 양육하여서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귀한 일군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4월27일
마14:13-21 헌신적 믿음과 기적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을 본문의 말씀 내용은 신약 4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기사입니다. 막6장, 눅9장 요6장 그만큼 이 사건은 대중적이면서도 기적중의 기적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도전과 헌신 그리고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큰 역사의 이면에는 언제나 작은 희생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칭찬 하셨습니다 스가랴 4:10 에서는 작은 일의 날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눈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느니라 하셨습니다.  (무시.실망 말라) 오늘 본문은 바로 어린아이의 작은 희생이 큰 축복을 보여준 기사입니다.
황혼이 ?게 물들어가는 늦은 오후 예수의 말씀 듣던 모두가 배고픔을 느낄 때 아무도 준비한 음식이 없었지만 청중들 중에 한 어린아이가 하루치 양식인 보리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자기의 소유 전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안드레는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말이나 하지 말지”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잔디위에 혹 백명씩 혹 오십명씩 떼를 지어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한 가정의 가장처럼 그 떡과 물고기를 친히 드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감사와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이것을 떼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때 떡과 물고기를 받은 무리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오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운것이 열두광주리에 찼다고 했습니다 오천명이 먹고 남은 기적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무리가 모일 때 주님이 역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야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는 것과 같이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나온 무리가 있을때 주님의 기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날땅에 사람들이 모여 바벨탑을 건조하여 사람들의 지혜를 과시한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렙산 아래 모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들이 갈멜산에 모여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여 신의 존재를 불신도 하였습니다 백성의 대제사장과 가롯유다가 모여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도 했습니다.  이같이 사람들이 모이면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자기 백성들이 모였으니 기적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가나 혼인집에 축하객이 모였을 적에 자기의 때가 안 되었다고 하시면서도 기적을 베푸사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열두 사람을 모으시고 천국 복음을 시작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인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원하는 자들은 이제부터라도 모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이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구역예배에, 금요기도회에, 제자 훈련에.. 바자를 위하여 김치 담그는 일에, 새벽기도회에 (한 주1회 작정하기운동) 모인 곳에 주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사 사무엘 시대에 이스라엘이 법궤를 빼앗기고 국가의 위기 , 신앙의 위기를 만났지만 미스바에 모였을때 하나님의 새로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2. 아이가 가진 물고기와 떡을 드림은 전부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있는것이 비록 초라하고 미미하고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그에게 있는 전부가 주님의 손으로 들려질 때 주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가진 소유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있는 것 전부를 다 주께 드렸던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집에서 나올때부터 자기가 먹지 않고 주님께 드리려고 가져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드릴만한 상황이 되니까 드리게 된것입니다 어리지만 영적 감동이 몰려올때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어제저녁 잠을 자려다 문들 교회 창문을 닫지 않은 일이 생각나서 염려할때 집사람이 하나님이 기도 하여고 성전에 보내시는 가 보다 하여 지체없이 달려 왔습니다.
과부가 드린 렙돈 두 잎이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가 가진 전부였기에 주님이 칭찬하신것입니다.  안인권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처음 교회에 부임하였을때 교회 재정 상황이 아주 열악했지만마침 러시아에 꼭 선교해야 할 일이 생겼을때 모아두었던 건축헌금 모두를 보내 드렸는데 그후부터 하나님이 계속 축복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전부를 바치는 충성이었을때 이룬 기적입니다.
이 어린이의 헌신은 만 배의 축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이 소년이 그 도시락을 자기만 먹었으면 한 사람의 유익 밖에 없었을 것이나 주님께 바치므로 오천명이 먹고 남았습니다.  왕상17장의 사르밧 과부도 이같은 일을 행했습니다. 마지막 한끼의 양식 아들과 먹으면 양식을 구할 수 없는 처지라 죽는 날 까지 굶을수 밖에 없는 데도 그는 엘리야 선지를 먼저 대접하고서 그 땅에 비가 내리고 풍년이 들때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왕하4:42-43에 보면 길갈에 흉년이 들었을때 한 사람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에게 와서 처음 익은 곡물로 보리떡 20개와 채소를 가지고 엘리사 선지자를 대접하고자 합니다 이때 엘리사는 그것을 신학생들에게 먼저 먹이라 하여 먹였더니 100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바치는 헌신과 희생적 신앙에는 하나님도 감복하시여 아낌없이 수천배로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울 것은 이 소년과 사르밧 과부와 같이 하나님을 감복시킬 만한 헌신적 믿음의 소유자 들이 되기를 힘써야 하고 배워 실천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재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3.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차고 넘치며 인생의 먹고사는 문제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색하게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최소한 30배, 60배, 100배입니다. 왕하4장에서 엘리사 선지가 생도의 부인집에 기름의 축복을 주실 때도 수백 배의 기름을 주시었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집에 예수님이 축복해 주실 때도 포도주를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었습니다.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또한 주님은 아이가 가져온 것을 놓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먹고사는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먹여 살리십니다. 사람은 다만 다소의 수고가 있을 뿐입니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마6:31-33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나라와 그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하셨습니다.
이 소년이 자기의 먹을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헌신 한것 같이 우리도 헌신만 합시다. 그리하면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영육간의 굶주림 없이 생명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굶어 죽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 하시는 분이십니다. 혹 시험을 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4. 남은 조각이라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6:12-13)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하였습니다. 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축사로 온 축복의 선물이기 때문이요 축복의 은혜를 낭비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주신 것을 낭비하면 이것은 사실상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생은 계속해서 배고픔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열두제자들이 제각기 바구니에 그 남은 조각들을 담아 열두 광주리에 채웠습니다. 이것은 예비하는 은혜입니다 육적 예비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언제 몰아닥칠지 모를 영적 기근의 때를 위하여 말씀의 예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예비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마실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영적 기근의 때가 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저축 , 기도의 저축 , 말씀의 저축 , 봉사의 저축을 하며 살아갑시다. 오늘 말씀을 교훈삼고 열심히 모입시다 이왕 헌신하며 살 바엔 전부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사시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소멸치 않도록 선물로 주신 구원 얻는 믿음을 잘 관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4월20일
막5:25-34 상실과 회복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한 여인의 가련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 중엔 누구에게나 한번은 이같은 상실의 시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행복의 요건을 잃어버린 아픔보다는 그 아픔을 해소해 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후반부 말씀을 보면 이러한 절망과 잃어 버림속에 처한 인생이 어떻게 하면 재기 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진정 현명한 사람이라면 인생의 삶에는 득 보단 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절망하지 않으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재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명한 삶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아끼고 소중이 여기던것을 잃어버리면 못사는 줄 압니다. 친구를 잃고 물질을 잃어버리며 권세 명예 건강을 잃으면 못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교훈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제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잃고자 하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신앙 안에만 들어오면 살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아멘합시다.
진실로 기독교의 진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라도 사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의 혈류병 여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야했던 12년 동안에 도리어 인생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이며 예수가 누구시며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큰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행여나 이 세상에서 잃어버리고 산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지 마시고 도리어 그 기간을 인생을 배우는 공부의 기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광야의 40년의 생활 바울의 아라비아 사막의 연단 욥의 고난은 결국 자신을 되돌아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 혈류병 환자의 12년의 기간은 어떤 기간 이었을 까요?
1. 건강 상실의 기간 이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기간
혈류증이란 병은 인체의 혈관 벽에 상처를 입었거나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흐름을 통하여 피가 흘러나오는 병으로서 성서학자들은 말하기를 여성의 신체 구조상 그녀는 매월 정기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혈류증이란 병은 그 여자의 활동과 생각하는 것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육체의 건강 상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활동의 정지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정신적인 건강 상실은 생각을 마비시켜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무디게 하고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 자신을 잃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병이 들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의 방법 위주로 살게 되는 타락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은 하루속히 회복되어야 하며 그 회복을 위해서는 정확한 진찰이 급선무 인 것입니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최신 의료장비가 있지만 그것들보다도 더욱 초 현대적인 장비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질병을 앓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렇게 선포 하십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태멘장로교회 안응섭목사 사모님 간증 춘개 대심방을 통한 말씀 카드의 에피소드 예화
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벧전2:24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 하시면서 예수님은 만병의 의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만병의 의사란 영육간 건강을 잃어버린 인생들에게 정확한 진단과 정확한 처방을 내려 주시는 참된 의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영 육 간에 건강을 상실한 심령들은 철저하게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만나야 합니다 이 시간 만나야 합니다. 아모스 5:4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2. 이 여인의 12년은 인간 관계 상실의 기간 이었습니다
육체의 질병보다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사람으로 부터의 버림 받음입니다
(티비프로, ) 선풍기 여인 , 알콜 중독자. 감옥 출소자 예화, 가인의 후예 , 가인의 절규, 26절에 보니 “이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 한다면 혈류병 환자의 질병을 고쳐줄 의사는 이 지구상에 한명도 없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관습상 부정한 병으로 규정된 질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가정과 사회
심지어는 성전에서 조차 도외시 되어야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피흘림이 있는 여인은 “앉든지 서든지 어디를 가든지 부정하다고 따돌림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인간관계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시카코 대학의 정신 의학자 엘리자베스 로스 박사는 ”  “죽음과 임종에 관해서” 라는 저서에서 불치의 병에 걸린 자들의 반응을 5단계로 표현했습니다.
1)Denial 부인
나는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 , 난 괜찮아, 설마 그럴 리가 있나?
2)Anger 분노
Why me 내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3)Compromise 타협
신앙을 가진 자는 신을 의지하고 그렇지 않은자도 더욱 초자연적인 힘에 의자하려 한다는 것
4)Melancholy 우울 이라고 표현
이 세상의 것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으로 인해 극도의 우울감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5)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Reception 수용입니다
모든 것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는“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인생은 결코 혼자서는 살수도 존재 할수도 없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혈류증 여인의 입장은 바로 로스 박사의 진단대로라면 죽음을 맞이하는 4번째 단계에 까지 다다른 것입니다. 극단적인 우울이 그녀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녀의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신뢰가 변하여 실망과 불신이 됩니다. 포용의 마음이 변하여 원망과 불평과 오해의 마음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서 불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인간관계가 단절된 시대라는 뜻입니다.
인간애가 끊어지면 대화가 끊기게 되고 무관심이 싹트고 개인주의가 발생하며 원망과 불평 오해가 생기게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를 치료할수 있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사랑에 굶주린 자에게는 애인이 의사가 될 것 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굶주린 자는 부모가 의사요 학문에 굶주린 자에게는 선생이 의사요 우정에 굶주린 사람에게는 친구가 의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마 9:5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3;14 예수님은 선생이 되셔서 우리의 발을 씻기셨다고 했습니다.
요15:55 너희는 나의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랑이요 선생이요 친구 되시는 주님과 참 교제가 이루어 질때 인간관계의 상실을 우리는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혈류병 여인의 12년의 기간은 물질 상실의 기간이었습니다
본문 26 “있던것도 다 허비 하였으되”12년이라고 하는 너무나 오랫동안의 병상의 생활이 그녀로 하여금 물질의 완전한 상실을 맛보게 했습니다. 잠언기자 아굴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하여금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이 기도 내용을 분석해 보면 인간은 물질이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 숨겨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풍요를 잃어버리고 가난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의식주와 약값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날마다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그로인해 그녀의 매일 매일의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 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건강 상실이 있었고 인간관계의 상실이 있었고 물질 상실의 기간이 있었다고 해서 이 여인의 삶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까? 그의 삶이 진정 불행하기만한 삶이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잃어버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십니다 잃는것이 있다면 얻는것도 있는 법입니다 혈류병 여인은 물질을 일고 건강을 잃고 행복의 대상을 잃었지만 신앙을 배우고 진리를 배우고 예수를 배우고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할렐루야!
동방의 의인이요 부자였던 욥이 자녀를 잃고 물질을 잃고 건강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이 끝장이요 실패였던것 같았지만 신앙 안에 있던 그에게는 잃어버림보다 새로운 얻음이 더욱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후 욥 42: 5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아멘...
예수그리스도는 잃어버리고 사는자를 찾아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잃어버렸다고 낙심만 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의 여인처럼 예수님 앞으로 찾아 나오십시오 그리고 아무도 나의 병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는 절망적이요 부정적인 마음을... 예수님 겉옷만 만져도 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망적이요 생산적이요 적극적인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그리고 여인이 예수의 옷을 붙잡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에 잡히지 말고 문제에 잡히지 말고 예수님께 붙잡히십시오 기적은 오늘도 일어납니다.  이시대가 기적이 끝난 시대가 아니라 기적을 이루는 믿음이 식어진 시대입니다 NO vision No revival 비젼이 없으면 부흥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받습니다.
혈류병 여인의 믿음을 가진 자가 혈루병 여인과 같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삶의 기로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주를 붙잡고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4월13일
막5:35-43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은혜중 세미나와 부흥집회 인도를 마치고 어제 귀국 했습니다.  그동안 종이 출타중에 강단을 지키고 교회를 돌보아주시고 기도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 하는 말중에 “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도 문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되면 한없이 용감해지기도 하고 한없이 비겁해 지기도 합니다. 또한 삶의 본능 앞에서는 모든 체면과 자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생명이 그만큼 귀하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회당장 야이로에게 12살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은 유일한 자기의 핏줄이었고 삶의 소망 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딸이 병들자 딸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치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딸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죽었다고 표현했고(마9:18) 누가와 마가는 죽어간다고 했습니다. 아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신분은 철저한 유대주의자요 정통주의자요 보수주의자였습니다. 회당장은 회당 예배위원을 임명하고 장로회 의장이 되며 행정의식 운영 및 질서를 지키는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비위를 거슬리는 예수님께 염치나 체면 불구하고 찾아갔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무조건 급하니까 찾아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이 그리 좋지 못하고 무엇을 모른다고 해도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자와 같이 하시고 당신을 찾아오는 자를 영접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눅15장의 둘째아들 탕자가 그 재산을 다 허비하고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아버지는 그를 영접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을 찾아간 야이로의 신앙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막5:22 "회당장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라고 했습니다. 야이로는 자기의 딸이 병들어 죽어 갈때에 예수님을 찾아가 고쳐 달라고 애원 했습니다. 그는 누구의 소개나 데려감으로 주님께로 간 것이 아니고 스스로 예수를 찾아간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과거에도 예수에 대한 신뢰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자기의 지위와 또한 체면을 의식해서 찾지 못했다가 가정의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를 찾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너무나 가정이 평안하고 사회의 지휘가 높아지는 것이 다 축복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가정의 환란으로 이 영과 육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회당장은 이같은 가정의 어려움을 통해 영혼까지 구원을 받은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정말 정의롭고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2. 야이로는 예수님의 기도의 능력의 손을 믿었습니다.
마9:18에 보면 회당장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했습니다 회당장은 병든 자기 딸에게 예수께서 안수해 주시면 병이 나을 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손만 대어도 낫겠다고 믿었으니 야이로야 말로 예수님의 능력이 강하심을 믿은 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야이로 같이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을 쫓으시듯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자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2)병을 고치고 제어할 권세의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3)갈릴리 바다의 풍알을 꾸짓으시고 잔잔케 하심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4)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수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오병이 어의 기적을 베푸심을 믿어야 합니다.
5)오늘 이 시대에도 주의 종을 통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육간의 모든 문제 해결의 역사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3. 야이로는 낙심하지 아니 하고 기도 했습니다.
막5:35의 기록에 보면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이미 죽었다고 소식을 전했지만 야이로는 조금도 당황해 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 간구하고 그의 능력만 기대하였습니다. 이 같은 일은 딸의 병을 고치러 온 가나안 여인 같은 자세입니다 (마15:12-28). 진실한 신앙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요셉은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서 대 성공을 한자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다가 그의 처에게 음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을 하며 나중에는 장관으로 부터 배신을 당하는 등 많은 괴로움이 있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섬겼으며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낙심하는 자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막5:23에 보면 야이로는 예수님을 보고 "발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라고 했습니다. “많이 간구하여” 많이/much 기도를 많이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구라는 단어를 원어적으로 보면 파라카레이 besought / beseech의 과거분사형 간절히 원하다, 탄원하다 구하다.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 달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해서 필사적으로쉬지않고 기도하는 신앙이야 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이고 자신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거듭해서 기도하여 얻은 승리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것을 알고도 하루에 세번 기도하여 사자굴에서 보호함을 받았습니다.
2)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일곱 번 기도하므로 하늘에서 불이 임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3)삼상 1:12에 보면 한나는 오래동안 간절히 (술취한 사람처럼)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았고 4)초대교회 120명의 성도들은 계속하여 열흘 동안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습니다.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4. 인간의 무력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는 아는 이들의 걱정이나 ,.. 조객의 애도도 헛되고 무력한 것이었고 죽음에서 소녀를 건지거나 그의 생명을 소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력한 인간들에게 소망을 주고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1)인간은 무력하기 때문에 뱀이 와서 하와에게 "너도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할때에 그 호기심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즉 무력하기 때문에 능력의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모험을 한 것입니다.
2)이성에 무력해진 삼손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들릴라의 유혹에 음행 죄를 짓고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소경까지 되는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3)돈에 무력해진 선지자 발람(민22:28-30)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청할 때 물욕에 끌려 예언하려 가다가 타고 가던 나귀에게 책망을 받고 천사의 견책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돈에 애착을 끊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4)질병에 무력해 있는 인생(막9:18-22)
한 청년이 귀신 들리고 간질병이 걸려 자주 불과 물에 드나들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가정과 이웃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해 줄 자는 없었습니다.
5) 죽음앞에 무력한 인생입니다(눅7:11-17).
지난 목요일 저희 작은 아버님이 소천 당하셨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이 어찌할수 없지만 정말 죽음앞에서 인간은 무력함을 느낍니다.  큰 고모님이 더 나이가 많으신데 목요일 오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식사도 같이 한 후에 집에 돌가가시자마자 심장이 멎어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고모는 오열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것이 인생입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앞에 인간은 무력하게 대응 할수 밖에 없습니다.
고모님은 발을 구르며 땅을 치고 하늘을 향하여 소리를 쳐도 죽은 동생이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할 수 없이 화장터를 향하여 가고 말았습니다.
6)재난 앞에 무력한 것이 인생입니다(욥1:1-).
동방의 부자요 아들 딸 10남매가 있던 욥은 태풍이 불어 닥치니 가정이 파괴 되고 말았습니다. 이같이 인간은 무력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성에 무력하고, 돈에 무력하고, 죽음 앞에 무력하고, 재난 앞에 무력한 인생들 이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5.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무력한 인간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이 시간 들어 보십시오
막5:23"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하소서. 이 회당장이 예수님께 구한 딸의 생명은 죽어 가는 생명이 아니라 사실 이미 죽은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는 소문을 통해 ... 아마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께서 모든 인간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회당장은 예수님께 대한 바른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눈을
가진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눅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2절 에서는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건강에 이상이 찾아왔습니까? 삶의 무기력이 있습니까? 재정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까? 삶의 막다른 길에 비겁해 지시겠습니까? 용감해 지시겠습니까? 예수에 대한 바른 눈을 가지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슬퍼서 울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믿으십시오 능력의 주님이 해결해 주실것입니다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한숨 쉴 시간 있으면 기도의 숨을 쉬십시오
기도는 만사를 변화 시킵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잔다는것은 깰때가 있음을 말합니다 야이로의 믿음 내 믿음 야이로의 기적 내기적이 될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 붙들고 새롭게 깨어나는 축복의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4월 6일
담임목사님의 출타중으로 이번 주 주일 설교는 박재용 전도사님이 선포 해주셨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원래 죽은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냥 죽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조상은 이름 가치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호랑이가 죽어서 남기는 값어치가 있듯이 사람은 자기 이름을 남길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세에 이왕 남길 이름이면 잘 살아서 좋은 기억으로 남기자’ 라는 뜻에서 세운 속담이죠. 때문에 저희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도 조심해서 짓곤 합니다.
요즘 트랜드도옛과 다를 점이 없습니다. 요즘은 PI 세대라고 (개인의 정체) 하는데 바로 개인이 스스로가 자본이라는 말이죠. 개인의 이름이나 상표, 또는 아이디어나 특징 같은 것이 값있는 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이름으로 어떤사람은 많은 관심도 얻고 대우도 받지만 다른 사람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죠. 왜 화가가 똑같은 그림을 그려도 평민이 그리는 것과 이름있는 화가가 그리는 것에 대한 값어치는 천지차이 입니다.
아마도 저희가 이런시대에 살고 있어 내 PI를  세상이 주는 값과  주님앞에서의  값어치가 저울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요즘 성도들이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분별하기 어려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자기 자신과 세상이 확실히 구별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저희가 신앙생활하면서 많이 접한 이름들이죠. 하지만 쉽게 접하지 않는 표현이 여기 38절에 나오는데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이라는 표현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했다”란  무슨 의미일까요?  세상은 어떤 물체나 인체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값을 매기거나 감당치 못했다는 표현이 어찌보면 적절하지도 않고, 또 이상하기도 합니다. 도데체 이 인물들은 어떻게 살았길래 세상이 감당치 못했는지 그점들을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나오는 인물은11장에 나온 인물중 가장많이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죠. 그는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무작정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땅으로 가라고 하니까 자기 재산과 가족들을 이끌고 나아갑니다. 또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큰 민족을 세우고 복의 근원” 되겠다 하셨는데 그때까지도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물론 의심도 했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에 반기를 들거나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 부인 사라가 꼬득여서 자신의 하인을 통해서 아이를 낳지만 그 결과 더 안좋은 결과를 않게 됩니다.  내용을 줄이자면, 이삭을 결국엔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아들 이삭이 겨우 생겼는데 또 하나님이 시험하시느라 자식을 바치라고 합니다. 구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 히브리서 말씀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그래도 하나님이 죽은 이삭을 부활시켜주시겠지”  라는 믿음이 있었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정말로 믿으려고 애쓰고 , 또 하나님의 약속을 무작정 의지하고 믿는 삶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자세히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우리와 별 크게 다른점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고난도 겪고, 부부싸움도하고, 사업도 뺏겨보고 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그 이유나 결과가 어떠하던 철저한 순종을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바치라면 바쳤던 사람입니다. 더 중요한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스스로를 다스려 하나님께 순종의 길로 가려고 애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있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시험의 어려움이 있었어도, 적어도 세상은 아브라함을 넘어뜨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이방인들 왕의 손에서도 건지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유혹의 땅에서도 건져주시고, 어디를 가서 무슨 사업을 해도 성공을 주셨습니다. 또 작은 숫자를 데리고 적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도 이겼습니다.다시말하면,  그 어느누구도 아브라함을 손댈수 없었다는 것
(1)이점에서 볼때, 세상이 아브라함을 감당치 못한 이유는 바로 순종에서 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이 아니라, 바로 순종의 열매가 믿음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순종할수 있도록 아브라함을 철저히 훈련시켰습니다. 노아의 홍수의 시대와 아브라함의 시대가 크게 먼 사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통해 무서운 하나님의 손길도 다시한번 체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단계단계마다 하나님을 의지 할수 있도록 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이 자신도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알았습니다. 이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하루하루 순종의 삶을 살때 시험을 통해 믿음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청개구리 이야기)(옳지 못한 순종—매일 순종하지 못한 결과)
우리도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나중에 하나님이 시험줄때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청개구리처럼 옳치 못한 순종하고…웁니다.)
(2)또 세상이 이 믿음의 사람들을 감당치 못하는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주 중요시 여겼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또 다른 장점은 하나님이 움직이게 하실 때마다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나, 주님이 직접 나타나셨을 때엔 또 정성과 가진 모든것을 사용해 대접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는 하나님께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하나님께 표현했지만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려 결코 악한 소돔과 고모라의 편에 서지 않은 아브라함을 볼수 있습니다.
그럼,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느정도 깊은지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것은 소중히 여겼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이 여겼지만 야곱은 치사할 정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귀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에서는 버림을 받고 야곱은 축복을 받습니다. 다시말해서 야곱이란 사람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열하고 치사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선 미워 할래야 미워할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바람끼도 있고 살인도 많이 하고 비열한 짓도 참 많이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늘 그리워 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 나온 수많은 시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요즘 잘나가는 음악가들도 음반 하나 내는데 몇달몇년을 걸리고 또 그다지 많은 앨범을 못 만드는데… 다윗은 수많은 시를 어릴적부터 늙었을 때까지 정말로 많은 시를 주를 위해 썼습니다. 음악이나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시간과 마음이 많이 투자가 되는 분야중 하나입니다. 정치에 바쁠 다윗도 하나님과 보내야 하는 시간만은 정말로 소중히 여겼을 것이란 말이죠.
저희도 관계를 중요시 하는 피조물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피조물로 만드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도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으로 관계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그 형상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을 찾아주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때문에 사람을 미워해서도 안되고, 이용해서도 안되고, 멸시해서도 안되고, 더우기 죽여서도안되는 것이죠.
부모의 역할도 우리 자식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깨닳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를 맺게해주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찾아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반대로 자식들로 하여금 세상을 따라가게 해주는 경향이 있지만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자식도 부모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통해 시험을 주시고 또 때론 어려움과 답답함을 주셔서 하나님께의 순종을 배울수 있게 하십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쉽게 배울수 있는 곳이죠. 물론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줄수 있는 부모이면 하나님의 사랑도 그 부모를 통해 나타납니다. 적어도 부모가 나에게 하나님게 죄 짓게 하는 것만 아니면 항상 순종하고 또 소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저희가 아는 큰 두 계명이있는데 (1)십계명 [1-4는 하나님과의 관계, 5-10은 세상과의 관계] (2) 예수님이주신 계명. 모두가 다 관계죠.그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계를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가까워야 세상을 이길수 있기때문입니다. 철없는 아이가 부모의 든든한 백을 믿고  담대할수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야 세상이 우습게 보입니다.
세번째로 세상이 믿음의 용사들을 감당치 못하는 이유는 이들은  세상을 버릴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예로 다니엘을 들겠습니다. 다니엘은 어린나이에 포로로 끌려와 바벨론에서 자라납니다. 다니엘은 모든 면에 출중하여 바벨론 왕궁에서도 욕심내던 인물입니다. 솔직히 어린나이에 포로생활이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포로로 끌려온 그 많은 아이들과 인재들은 다 바벨론의 생활에 적응해가고 만족해 했으나 단혹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만 자신들을 그 세상에서 교리시켰습니다. 왜냐, 아무리 바벨론처럼 웅장하고 대단한 나라에서 귀한 대접을 해 줄지라도 이것과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과 비교해 볼때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수워했습니다. 그 아무리 왕일지라도, 사자굴일지라도, 풀무불일지라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더 크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너무 무모하고 또 삶을 쉽게 보는 것이 아닌가?? 란 생각도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나 환경을 우습게 여기고 막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일에 열심히 충성스럽게 할수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타협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하나님을 택하느냐, 세상을 택하느냐에 있어서 그 선이 clear 해야 합니다.
세상은 어떤지 아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택하도록 유혹합니다. 가끔은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고, 편안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랑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이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께 향해야 하는 마음과 동일한데 사탄이 역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영역에서 방해가 됩니까? 생명(생명이 제일중요하니까)과 제일로 가까운 의식주를 공격하고, 돈과 세상문화로 공격을 가합니다. 때로는 없으면 안되게 합니다. 명품같이 하나를 원하면 그것에 맞추는 삶을 살기위해 더욱 그곳에 빠지듯이 작은것에서 부터 큰것까지 야금야금 우리의 삶을 빼앗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Cell Phone 이나 Internet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밥을 안먹는 한이 있어도 이것은 빼앗지 못합니다.
즐기는 것 다 좋고 가지고 있는것 다 좋은데 우리는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면 버릴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금식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육을 희생시켜 음식보다 하나님이 소중하다고 고백하고 우리가 몸소 체험하는 것 아닙니까? 음식을 취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목숨보다 중요한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문화 생활 즐기는 생활 다 버릴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은 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따르고 찾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있는 위치나 재물을 다 버릴수 있었던 사람이기에 때로는 물질도 부어주시고, 때로는 힘도 주시고, 때로는 능력도 주시고 하는 것입니다. 정녕 여러분이 자신의 삶과 자식의 삶이 세상에서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길 바라십니까? 아니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길 바라십니까?
사도 바울은 육의 것을 찾으면 육에 속한자요 영의 것을 찾으면 영에 속한자라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도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9 . 직설적이긴 하지만, 세상따라 살면 지옥이라는 말씀이요, 주님 따라 살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따라 살아야 하는 삶이 무슨 삶인지 깨달으시고 그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이 이들을 감당치 못한 이유는 바로 하늘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간단하게 생각할수 있는 부분입니다. 세상은 이곳에 속한 육의 것이고, 하늘의 소망은 하늘에 있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모두 하늘에 속해있으면 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감당치 못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훈련이 두종류( 당근과 채찍)인데 사탄도 같은 것을 사용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유혹 즉, 당근이고 다른 채찍은 바로 환난과 학대입니다.
사도행전과 역사에 나오는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36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사탄은 성도들을 무너뜨리려고 갖은 고난과 핍박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선교지에 가면 이런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육체의 어려움이나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하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처음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를 건드릴수 있는게 없다고 했는데 왠 환난과 고통의 이야기일까?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심령, 즉 마음과 영은 환난과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죽음이나 죽음 직전의 고난은 견디기 힘이 들지만 죽은 후에는 천국문에 주님이 맞이하시려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데 죽음인들 마다하겠습니까?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것이 없다! 고들 많이 이야기 하죠? 같은 원리입니다. 하늘에 소망이 있으니 내 마음은 하늘에 빨리 속하고 싶어야 합니다.
내가 이땅에 남아 있는 이유는 딱 두가지 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 하나이고, 다른 것은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다시말해서 지금 데려가면 지옥갈까봐 참고 계속 봐주시고 있다는, 즉 기회를 주시기 위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무서운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가망이 없다..싶으면 바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정녕 하나님께 나아올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하지만 또 내가 하나님의 역사를 다 이루고 나면 하나님께서 또 바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속히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지도록 찾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사시길 원하십니까?
부디 하나님께 매일 순종의 삶을 사셔서 믿음을 키우시고, 매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의 삶을 지키시고, 나아가 세상을 버릴수 있는 삶을 주님께두어 하늘에 소망이 있는 자들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삶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여기 나온 믿음의 영웅들 처럼 사시면 세상을 충분히 이기시는 여러분이 될 것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3월30일
눅8:26-39 더러운 귀신아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거라사 라는 동네 (마태복음에서는 가다라로 표시)에 귀신들린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 거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면 살아왔는데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시고 고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귀신들려 무덤가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무덤가 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별로인데 거기에다 귀신이 들렷다니 시쳇말로 등골이 오싹합니다.  귀신들은 예로부터 유익은 조금도 없고 온전히 악독만 끼치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모든 사탄의 권세를 정복하시는 주의 위대한 권능의 표시요 둘째는 사람의 생명을 물질 이상으로 더 중요시 하시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귀신 또는 마귀(사단) 의 존재를 규명해 봅시다.  귀신은 하나님이 지으신 천사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마귀(사단)의 졸개들이다 성경을 다펴라 사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계명성 / How art thou fallen from heaven, O Lucifer, son of the morning! 루시퍼 천사의 타락입니다 성경에서는 천사의 이름을 말씀합니다.  쁜소식 전하는 가브리엘 찬사
공의의 심판 소식을 전하는 미가엘 천사 등
귀신은 특별히 사람들을 불행케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한 이후 지금까지 인간들을 괴롭게 하는 귀신의 활동을 찾아보면
1. 여러가지 질병을 주어 사람의 육체를 괴롭게 하며 사람들을 죽이려고 공갈 치기도 합니다
막9:18-22)산 밑의 아버지와 귀신들린 아들의 사건/자주 불에 넘어짐, 거품, 이를감. 파리해짐
2. 사람들의 심령을 괴롭게 합니다.
(1)사람들을 미혹하여 거짓으로 가르치며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이간질을 자행함 (창3:1-8)  에덴동산 / 하나님은 선악과 먹으면 죽으리라 마귀는 죽을까 하노라 네가 먹으면 눈이 밝아 지리라 정욕의 눈
(2)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강팍하게 충동하기도 합니다 (삼상19:8-11).
9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수금을 탈 때 단창 던짐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은지라 , 아나니아 삽비라/ 악독이 네게 가득하여
오늘 주님께서 거라사인의 귀신을 쫓으신 내용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인간은 무엇이든지 그것에 얽매여 살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떤자 는 탐욕에만 얽매여서 얻지도 못하는 일의 욕심에 빠져 있고, 어떤 자는 술에 중독되어 그것을 먹으면 파멸에 임하게 됨을 알면서도 절제하지 못하고, 어떤 자는 도박에 빠져 경제적 손실이 있는 것을 눈앞에 당하면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헤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지 아니하고는 인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8:3-11)에 음행을 하다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힌 여인은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당연히 돌에 맞아 죽어야 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항소도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이자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이로써 용서받고 그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귀신들렸던 자들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일생을 불행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 어느 것에 얽매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지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얽매인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2.귀신에 (사단)에 억매이게 되면 자유 분방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귀신들린 자를 집에 머물도록 고랑과 쇠사슬로 묶었으나 고랑도 쇠사슬도 다 끊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의 자유를 제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누리려고 했습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어떤 제재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무한 자유를 누리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모의 말씀도, 스승의 말씀도, 성경 말씀도, 그 누구의 말도 잘 안듣습니다. 이는 이유가 없는 반항들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실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지 말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응하며, 나라의 헌법을 준수하여 인륜의 윤리를 어기지 말 것이며 자기 양심의 법도를 저버리지 말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무책임한 방종을 추방하며 책임 있는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자가 되어야 사람다운 가치를 나타내며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3. 은혜를 배신하는 각박한 자들이 있음을 교훈합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들은 무덤 사이에 거처를 삼기도 하고 산과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므로 주민들을 불안케도 하고 아무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도록 발작케 할뿐 아니라 자기 몸을 돌로 상하게도 하고 , 의복을 입지 못하게도 하고 쇠사슬을 끊게도 하였습니다. 이같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으니 즉 도저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자를 성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기에 거라사인 들은 마땅히 예수께 특별한 사례를 드리고 대접이라도 했어야 마땅한데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저들은 예수의 자연적 능력을 확인하면서도 돼지의 떼죽음 같은 물질적 손실이 또 발생할까 염려되어 떠나기를 구한 것입니다.
사실 귀신들린 사람을 주님께서 내어 ?지 아니했다면 이보다 더 많은 불행이 온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에 붙잡힌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귀신들린 자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4. 인간의 생명은 귀중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수치를 발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으시니 귀신들은 그 근처에 돼지떼에게 들어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고귀한 인간의 생명에게 귀신이 떠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자 약 2천마리의 돼지떼가 몽땅 바다에 들어가 죽었습니다. 돼지떼가 희생이 된 것이 아까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대신 두생명의 인간이 온전해졌고 정상인으로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돼지 2,000마리의 값으로 계산하면 2,000 x 200불= 40만불의 막대한 돈입니다.
그러나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두 생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돼지 2,000마리보다 한 인간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가장 귀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우리 온 기독교들은 인간의 생명을 구원해 내는 선교와 교육을 위해서는 물질과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7에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중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사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마치 옷을 벗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속이며 살아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삽니다. 무례한 일을 하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삽니다. 우리는 조그만한 허물에도 부끄러운 줄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말세를 당한 이때에 벌거벗고 다니는 자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옷, 세마포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계시록 16장15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39절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하셨습니다.  고침 받은 그들은 자기 가정으로 ,. 자기 일터로 돌아가,. 정상적인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기가 체험한 은혜의 간증담과 주님이 행하신 일과 예수님에 대하여 그 온 지방에 전파했습니다.
이같이 예수님 앞에 나와 변화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된 사람은 각각 자기 처소에서 정상적으로 살며 변화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언제나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생활을 통해서 변화된 온전한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알고 따르게 된 것은 정말 복된 일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받은자 이제는 더욱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며 귀신과 귀신이 하는 일에 억매이지 말고 주 안에서 영적 자유를 누리며 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3월23일
고전 15:57-58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는 믿음위에 오늘 나의 생활속에 부활의 은총으로 함께 하실 주의 은혜를 ?들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시간 부활 퍼포먼스를 한번 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한번 말 할때마다 여러분은 아멘 하시면 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 이것은 부활의 주님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주신 은총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부활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결론적인 선언과 권면이 담긴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57절에서 특별한 권면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말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 모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사람들이 죄의 권세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 멸망의 자리에서 부활과 영생의 복된 자리로 옮겨진 승리를
얻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감사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이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이 말씀에 3가지 권면을 찾을수 있습니다.
1. 견고하며 ....Stand firm .. 무엇에 견고해야 합니까? 복음을 믿는 믿음에 견고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모든 사건들(Events)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 십자가에서 죽으심, 돌무덤에 묻히심, 사흘 만에 살아나심, 하늘에 오르심 그리고 다시오시마고 약속하심… 등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직접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어떤 특정한 사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며 어떤 특정한 사건을 제외시켜 버릴 수 없는… 사건들 전체가 담고 있는 소망의 복된 소식입니다.
물론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변함 없고 감사한 구원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야 하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복음의 사건들을 부인하면 '기독교는 불필요한 인간집단이 되고 부활의 소망이 헛되며 내세가 없는 인생'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처럼 욕심껏 살다가 죽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도덕도, 윤리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내가 편한 대로, 즐기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생과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는 세월이 흐르면 노화 되게 되어 있으며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들은 아무리 새것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낡아지고 소모됩니다.
그래서 물질, 물건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값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물질로 구성되었더라도 생명 없는 물체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인간의 육체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건에는 감가상각비 라는것이 있습니다 물건은 쓰면 쓸수록 낡아지며 소모됩니다 그래서 해마다 물건이 소모되는 만큼의 가격을 줄여 평가하고 그 가격만큼 새 물건을 사들이도록 비축해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가상각비' depreciation expenses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해마다 늙고 쇠하고 약해져 감가는 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육체를 사들일수있는 상각비는 비축할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값도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작년보다도, 어제보다도 값이 싸졌습니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가 가장 비쌉니다 그리고 자라는 것 같지만 결국 죽음의 길을향해 가는것입니다.  물건이야 감가상각비를 비축해 둘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감가상각비를 둘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날마다 늙고 쇠하여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기만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으면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날마다 자라가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쇠해지나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우리의 값이 천하보다 귀하게 되어 우리는 모두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감가가 되어 쇠하여가지만 그 속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영생을 믿는 우리 생은 헛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믿는 믿음에 견고해야 합니다.
2.흔들리지 말며 nothing move 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까?
"썩지 아니하고 영원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들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을 소망하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수 있으며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 즉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을 만나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존재는 의미 있으며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실 때는 살아있을 만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하루의 생명일지라도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챤은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이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흔들어 댑니다. 때로는 질병으로 흔들어 봅니다 부부끼리, 부모 자식간에, 형제간의 관계로 흔들어 봅니다. 물질의, 사업의 어려움을 가지고 흔들어 봅니다. 사탄은 믿는 사람끼리 부딪히게 해서, 상처받게 해서 흔듭니다 교인들 간에, 목사와 교인 간에 서로 부딪히게 해서 삐지게 만듭니다. 사탄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흔들어 댑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일터가, 우리가 믿음으로 섬기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기 위해 애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약한 인간이니까 흔들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는 흔들리는 것 같아도 제자리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뿌리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예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흔들어서 흔들리는 것 같아도 제자리에 다시 서는 견고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현실에서 여러 고난에 부딪히고. 각종 시험과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다시한번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보증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애써도 흔들면 흔들리기 때문에 성경대로 모여 예배하고, 모여 기도하고, 모여 말씀 듣고 힘 얻어… 세상을 향해 나가는 신앙생활의 공동체,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들어 은혜 받고 힘얻어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3.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우리가 믿는 복음은 우리의 응답, 반응을 요구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빛 되고 소금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해야 할 책임과 그에 따른 보상 및 징벌이 있음을 알아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단 우리가 주의 일에 힘쓰는데는 원칙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관심을 끌기 위해 일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주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못하느니라"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의를 행할 때는 숨어서 은밀한 중에 하고 사람에게 보이려 해서는 안 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그의 선행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이목이나 주의를 자기에게 끌어오기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선을 행해도 자신은 감춰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그것을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이만 하면 잘했는데 박수 쳐 주지 않나'하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고, 선한 일을 하고 싶다면 자기 이름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이름으로 복지시설을 세우고, 학교를 세운다면 결국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고, 자기가 영광받으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세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고 예수 향내 풍기게 되고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모습은 감춰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푸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답게 자신의 모습은 감추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사람의 자녀들까지도 복되게 하십니다.
"자기 의를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예를 얻어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행하지 말고 하나님앞에서 행하여야합니다 제가 목회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사람의 눈치를 보며 설교하고 목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하는 설교나 목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회가 되어야 하고,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새벽 찬양대원들이 찬양을 하기 위해 일찍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일찍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늦으면 지휘자가 눈치를 줄까봐 일찍 오셨다면…죄송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했어도 그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했습니다. 성경은 보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는 상급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상에 대한 관심은 정당한 것입니다 한때 사람들은 믿음 자체에만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신자가 보상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도처에 하나님의 보상에 대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히12:2 에 보면 예수님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히11장에 기록이 신앙의 위인들이 왜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끝까지 진실하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신앙의 수고를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사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자로 임하실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릴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생의 소망을 갖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복음을 믿는 믿음에 견고해야 합니다.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면서…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하며… 괴로운 일이 많아도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기도하며 가고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되게 하소서"라고 찬송하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갈 때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저런 바보, 푼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우리의 수고가, 애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확신 가지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불타는 사명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3월16일
막11:1~10 드릴 것과 벗을 것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을 고난주간 이라 하는데 고난 주간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가급적 말을 삼가며 불필요한 말, 험담하는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경건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금요일은 전교우 금식일 입니다. 모두 동참하셔서 경건의 훈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올리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 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심을 기념하는 절기인 유월절이 되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때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대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길은 며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큰 일 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호산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이름 없이 빛 없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 마10장 4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때, 냉수 한그릇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사람들이 누군지? 무엇을 드렸는지를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나귀를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크게 한 몫 했던 사람은 나귀를 드린 사람입니다. 성경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9장9절의 예언을 이루어가셨습니다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공의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가 있는 곳을 알고 계셨고 나귀의 주인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귀가 있는 곳으로 보내시면서 매어잇는 나귀를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심부름을 간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나귀는 그들의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고 수송, 통신 수단으로 귀하게 사용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나귀의 주인은 쾌히 승낙하고 나귀를 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처음으로 새 차를 뽑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임시번호판을 부치고, 프라이스 스티커도 뜯지 않은… 새 차가 집에 도착했는데 안목사가 급한 일로 그 차를 좀 쓰겠다고 하며 모르는 사람을 보냈다면… 선뜻 자동차 키를 줄 분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께 나귀를 내 준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이 쓰시겠다는 말에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곧잘 찬송을 부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입술 고백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원하지만 골치 아프고, 손해나는 일이 있을 때는 슬그머니 빠지거나 집어치우려 합니다. "내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 원합니다" "나를 쓰시옵소서."… 하지만 "모든 조건이 좋을 때…"만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귀 같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실 때 내놓을 수도 있고, 내놓지 않을 수도 있는 나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귀 가 그의 전부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돈, 지식, 기술, 체면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자고 할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아멘'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나귀는 무엇입니까? 시간, 명예, 기술, 지식, 돈 예수님이 쓰시고자 할 때 기꺼이 내놓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며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셨고 바울은 디모데, 실라 등을 선택하였으며 제자들은 스데반을 비롯한 집사들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회자인 저도 심각하게 기도하고 신중히 여겨 사람을 지목하여 그 사람에게 있는 나귀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라고 권고합니다.
어떤 때는 시간을 내라 하고, 재능을 내라 하고, 물질을 내라 합니다... 어떤 때는 교사를, 찬양대원을, 구역지도자로 때론 천하고 궂은일을 하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나귀를 감춥니다.
경험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시키십시오..... 돈이 없습니다.... > .....
기도하며 부탁했던 목사가 민망해 돌아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우리를 쓰시려 할 때, 우리의 것을 요구하실 때… 얼마나 '아멘'했고, 얼마나 거절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나귀는 짐을 많이 실어봤고, 사람을 태우는 일에 익숙한 나귀가 아니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나귀도 아닙니다 그 나귀는 아직 아무것도 해 보지 않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경험도 없는 새끼 나귀였습니다 not donkey only colt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을 때 나귀의 주인처럼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2. 겉옷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덮고 길에 폈다' 함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들의 옷은 우리의 옷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외투를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속을 드러내게 되는 부끄러운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옷을 많이 입습니다. 속옷부터 시작하여 겉옷까지 3~5개 정도는 입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옷차림은 한 두 개 걸쳐 입는 옷차림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옷을 벗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부끄러움, 자신이 당하는 손가락질, 모욕… 상관없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겉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고 있는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해석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느낀 점은 '정말 많이 배운 분들은 겸손'합니다 제대로 배우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런데 조금 좀 배운 사람들은 아는 척하고 교만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의 겉옷도 벗어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분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머리 숙여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신분 표시가 아닙니다. 집사보다 권사가 높고, 권사보다 장로가 높고, 장로보다 목사가 높은 신분의 높고 낮은 계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맡겨진 직분일 뿐입니다. 더 겸손하게 일해야 합니다.
나이의 겉옷과 생활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집에서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교회의 궂은일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선후배 따지지 말고 봉사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양심의 손을 얹고 답해 보십시요 그동안 건축기금 마련을 위하여 야드세일 바자 카워시 등을 하고 또 교회 대청소 교회 이사 등을 할때 여러분은 잘 참여 하셨나요 아마 한번도 참석 안하신분도 혹 있을것입니다 벗어야 합니다 스스로 고귀한체 하는 겉사람 죽어야 합니다.
감정의 겉옷, 체면의 겉옷, 자존심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참고, 빌고,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겉옷을 벗을 때 예수님께서 높아지시고 드러나시게 됩니다.
3. 종려나무 흔들며 "호산나"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며 입으로는 "호산나"하던 군중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예수님을 만나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이적, 오병이어의 기적도, 문둥병자,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정치적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 높은 세금의 경제적 압박에서 해방시켜 줄 지도자로 - 식민지인들의 한숨과 탄식의 불안한 사회에서 해방시켜 줄 혁명가로 기대하며 "호산나" (구원하소서)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많은 군중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유월절 특사 선택에서 엄청난 죄인 "바라바"를 택하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주변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있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정말 같이 있어주고, 아파해 주고, 눈물 흘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을 홀로 두었습니다... 우리는 나귀를 드렸던 이름 없는 그 사람, 겉옷을 벗어 드렸던 그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직접 개인적인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떠드는 군중속의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즐겁고 좋은 길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낭패와 실망의 길도 아닙니다. 가지 못할 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보람된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못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려 하실 때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의 궁정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것과 그 백성들을 데리고 시내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왕 앞에 가야하는 모세에게 군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준다든지, 금관을 준다든지, 어인 찍힌 반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무서워 벌벌 떨며 하나님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입이 뻣뻣합니다. 나는 못 갑니다.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내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땅에 떨어진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고, 뱀을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통해 모세와 함께 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바로 앞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모세는 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배 후에 집에 가도 가정에 있는 문제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귀와 같은 것, 겉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옷도 벗겨졌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하시려고, 고난 받으셨습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몸을 버려 피 흘렸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고 너희들이 영원히 살 길을 주었는데 너희들은,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려느냐?"
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 음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겸손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의 삶 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3월 9일
눅8:22-2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당신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나도 복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영웅이 됩시다.  오늘 아침 제자훈련 을 시작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창밖을 보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지 새삼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탁 트인 전망에 새봄의 기운이 싹트는 대지를 바라보니 절로 찬양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 오후 늦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의 서쪽 언덕으로부터 배를 저어 동쪽 언덕을 향해 떠나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호수는 한없이 잔잔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군중들과 환자들, 귀신들린 자들에게 시달리시다가 이러한 고요한 시간과 아름다운 정경들에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기분 좋은 피곤이 몰려오셨는지, 배의 뒤쪽 고물에 가셔서 그물더미를 베개 삼아 주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몇몇의 제자들도 몰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황혼의 빛이 호수 수면에 고요히 깔릴 즈음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습니다. 천둥소리가 요란스럽고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사나운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성난 파도가 뱃전을 사납게 때리기 시작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오래 동안 어부 생활을 한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 풍랑이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공포에 질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속에서 노를 저으려고 애썼으나 점점 풍랑이 거세지면서 갈팡질팡 거릴 뿐 진척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 배가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배가 두 쪽으로 갈라질 것같습니다.
제자들이 너무나 겁에 질리어 '선생님 큰 일 났습니다. 우리가 죽게되었습니다.'라고 고함을 지르며 깊이 잠드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시더니 무슨 짐승에게 명령하시듯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호수를 향해 "호수야, 잔잔할지어다"라고 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는 기가 막혔습니다 '아니, 아직도 주님은 잠이 덜 깨셨는가? 호수가 무슨 생물인가, 거기다가 명령하다니'라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난 호수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잔잔해졌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나무라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왜 무서워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도 세파에 시달리며 놀라고 근심하고 낙심하는 우리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책망하실 때가 있으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에는 많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1.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 하심은 '나와 함께 동행함에도 왜 동요하느냐?' 는 교훈 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가 함께 있음에도 제자들이 마치 죽을 지경이나 만난 것처럼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에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 세계적인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들이 맹장 수술을 앞두고 벌벌 떨면서 '아빠, 나 수술하다가 죽으면 어쩌지요?'하면서 울고불고한다면 되겠습니까? '야, 이놈아, 아빠는 심장이 못쓰게된 사람도 완전히 고치는 세계적인 의사인데, 너는 아빠를 의심하고 그렇게 못 믿느냐?'고 하면서 화가 나서 책망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능력자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큰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시고 평화로이 주무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서.. 무슨 조그마한 일을 만났다고 해서 심하게 동요한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을 무시하시는 것이기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처지에 놓이든지 절대로 동요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성도는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더니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안절부절 하고 울고불고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원망하기에 바쁩니다. 보기에 안 좋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신앙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분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어느 성도는 예수님만 믿으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는 줄 압니다. 언제나 건강축복, 물질축복만 있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만사형통한 일만 생기고 위험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다가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노라 했는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십니까? 왜 내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원망의 기도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가던 제자들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시23에보면,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실때도 있으시지만,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인도하실 때도 있고, 원수 앞에 이르게도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이라고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도 온갖 시련을 겪었고, 요셉과 모세, 다윗과 다니엘도 시련의 골짜기에서 고난의 쓴 물을 마실 때가 많았으며, 바울도 쩍하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과 불신자의 차이점이 무언지 아십니까?
똑같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국 승리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풍랑을 만나도 잔잔하게 하시고 홍해를 만나도 갈라지게 하십니다. 여리고의 장벽을 만나도 무너 뜨림이 역사를 체험합니다 사자를 만나도 그 입을 봉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만나도 부활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조금도 동요하거나 남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풍랑 중에도 고요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인 예수님처럼 무슨 풍랑 중에도 담대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감사할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성도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1888-1951 고신파 목사님이신 한상동 목사님과 동시대의 거창의 주남선 목사가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잡혀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하여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었다. 엄지 손가락 두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달기. 고추 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짓누르기. 손톱 사이에 대나무침을 꼽기.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이러한 악형을 한 차례 가한 형사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이켜.”라고 주 목사에게 말했다. “백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든다. 주 목사는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고 사방은 조용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 엎디어 이 시련을 이기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 땐 온돌방처럼 따뜻하였다. 그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그는 깊은 잠에 잠겼다 주 목사는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포근한 담요는 우리 주님 자신이었어요. 나는 주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읍니다.” 주님은 당신과 같이 고난받는 자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조금도 요동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 때에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의 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2.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너희 믿음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느냐?'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돈이나 물질만 바라보면 우리가 물질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 리가 음란만 바라보면 음란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위대한 얼굴을 사모하면 위대한 얼굴이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사납게 요동치는 바람과 풍랑만 바라보다가 결국 마음이 풍랑에 사로잡히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능력이 많으신 주님만 바라보았어야 합니다 TV의 채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똑같은 텔레비전이지만 화면에 다른 그림이 나타납니다 채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그 삶의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은 달라집니다.
우리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 공간에도 하나님의 능력의 전파가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변화의 능력, 치유의 능력, 가지가지 환상, 응답의 능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의 전파를 어떻게 우리 삶의 화면에 나타나게 합니까? 우리의 믿음의 사이클을 우리 주님에게 맞추어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의 사이클을 맞출때 우리 삶의 화면에 그의 강한 능력이 나타나는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고 '오라'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믿음으로 나갈 때는 풍랑 위를 거니는 기적을 체험했으나 풍랑을 바라보고 무서워 의심할 때 가차없이 풍랑에 빠지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세상의 무슨 지식이나 재물, 지위나 식구들에게 두지 마시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믿음으로 사이클을 맞추십시오. 그 때 우리의 삶의 화면에는 주님이 베푸시는 가지가지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왜 믿음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라는 무기를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내가 이루어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하나님의 기적과 구원,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에 대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니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믿어집니다. 십자가와 부활, 재림과 천국이 다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분들은 ,.. 하나님께 믿음의 선물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을 선물로 반드시 주십니다. 또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그 믿음을 지키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믿음을 잃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적 마음의 밭에 처음에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 겨자씨를 빼앗아 가버리려고 합니다. 믿음을 빼앗기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믿음을 탈취 당하다 싶이되니까 어제까지 하나님과 대화할 정도로 영적 깊이가 대단하던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멀리 피하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을 빼앗기면 어제까지 그렇게 확실하게 믿었던 하나님의 존재와 그 사랑, 십자가와 부활, 천국과 지옥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고 전부 의심이 됩니다. 설교를 들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니 그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2)믿음을 지키라는 것은 믿음을 자라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무기물이 아니고 유기물입니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보석으로 비유하지 않고 겨자씨로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을 받을 정도로 적은 믿음을 소유하던 제자들은 나중에 하루에도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고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해 '나는 은과 금이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담대히 외침으로 일어나 걷게할 정도의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것입니다.
(3) 믿음을 지키는 것은 봉사와 헌신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라게 됩니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마치 비료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는데 계속 말씀을 듣고 배우고 연구하면 그 말씀이 비료의 역할을 함으로 30배, 60배, 100배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자라려면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일하는 팔에 힘이 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면 그 주시는 믿음에 따라 순종하여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주일을 지키라면 힘들지만 무조건 지켜보십시오. 십일조 하라면 생활비가 부족할것 같지만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용서하라면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화해의 손을 내밀어 보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한끼 밖에 남지 않은 사렙다 과부 같은 입장이지만 무조건 대접을 해보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캄캄한 날을 만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하실 줄 믿고 오히려 더욱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그러면 이상하지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때 더 큰 믿음이 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 있습니까? 무슨 어려움을 만나든지, 우리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담대히 믿고 조금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앞서 인도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믿음의 사이클을 맞추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지키며 더욱 더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순종으로 행함으로 믿음이 30배, 60배, 100배로 자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2008년 3월 2일
마9:27-31 너희 믿음대로 되라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세 종류의 소경이 있다 할 수 있는데 과연 나는 소경이 아닌지 자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육신 눈의 소경이 있습니다.
2)지식에 눈이 어두운 소경도 있습니다.
마13:14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자 ,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보아도 이해를 못하는 자들 3)영안의 소경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눅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했습니다. (2)가치관이 희미하여 분별력이 없음 소경은 측은히 여겨야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측은히 여겨야 할 대상은 영적 소경들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길을 못보고 죽음의 길로만 가고 있기 때문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앞에 계시지만 그것을 모르고 붙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인 줄도 모르기 때문이요. 형제를 비판할 줄은 알면서도 자기의 추한 모습은 볼줄 모르기 때문이요 현실을 볼줄 알면서도 내세는 볼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귀중성을 알면서도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때로 영적 소경이 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영적 소경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영안이 떠지도록 빛 되신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백성이 사는 길은 영적 눈이 열리며, 영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생명이신 예수를 알게 되고, 이로써 양심이 밝아져 죄를 두려워 하게 되고, 부정, 부패, 불의에서 멀어지게 되고, 의를 찾아 광명의 생활로 나가 올바른 인도를 걷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축복된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 교훈
1.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라는 뜻이 있다(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버나움)
이 소경들은 가버나움에서 야이로의 집까지 따라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장애는 눈이 어두운고로 예수님을 쫓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소경과 같이 예수를 바로 알고 따라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를 어떻게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것입니까? 예수를 메시야로 아는것입니다.
메시야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분으로 죄에서 자유를 주시며,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을 주어 모든 고통에서 평안을 주는 분, 어둠에서 광명을 주며 절망에서는 소망을 사망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예수를 바로 아는 것이며 이렇게 알고 따르면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당시 소경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놓칠까봐 지팡이로 더듬으며 모든 불편을 무릅쓰고 예수님이 계신곳까지 따라 갔습니다. (안내견도,돕는이도 없이) 이는 오직 예수님에게 믿음과 유일한 소망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를 때에는 이 소경들과 같이 어려움이 많습니다. 때로는 미움과 핍박을 받고 못난이 취급도 받고 인본주의, 물질주의, 현실주의 자 들 앞에 따돌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 참 소망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1)나를 완전케 해 주시는 소망 2)영안이 밝아지는 소망 3)광명한 생활을 가지는 소망 4)모든 육적 영적 병에서 치료를 받는 소망 5)부활의 소망 6)천국의 소망 7)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는 소망 이 모든 소망이 예수에게서만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에게만 소망을 걸고 살 것입니다.
2.믿음이 치유의 전제조건 임을 알게 됩니다 (28하).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예수님은 은혜로 응답해 주십니다 28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네가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외다 이들은 그 믿음 때문에 흑암에서 광명을 찾았습니다. 믿음은 귀합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구하지도 말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믿음가진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제자훈련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사람”
1)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2)하나님께 구하는 것이고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3)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롬12:1) 4)하나님을 시인 하는 것입니다(롬10:10).
5)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엡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6)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빌4: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즉 믿음이란 인간의 공허함과 하나님의 충만한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와 같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3. 소리쳐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한 부르짖음은 겸허한 자세로서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요청하는 하나의 기도입니다. (세리의 기도,336천부여 의지 없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언제나 그런 자세에 서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왜 응답하지 안하셨을까요?
1)저들의 열성과 간절한 소원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기 위해서라고 생각이 되고
2)저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기 위해서이고
3)어느 시점에 가서 이루어질 은혜의 가치의 귀중성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곧 응답이 없다고 기도를 중단하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올 때 오히려 은혜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런 경험 많이 체험 하시지요?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분들 우리교회가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체험을 하였습니까? (그래도 낙심 않고 기도했기에 이 성전 주심)
4. 예수를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소경은 소리만 질러 구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거지의 눈을 만져 주시니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독 신자가 기도는 많이 하는데 기도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과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했는데 응답이 없다면 예수님과 만나지 못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만나면 의견이 교환되고 상대방의 처지를 알게 되며 해결방법을 공동으로 노력하고 연구하며 좋은 일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이 필요 합니다 교회 안 나오면 목사는 무조건 갑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 된 일이 많이 있습니다.
1)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죄문제를 해결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눅19:10
2)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영생의 방법을 알게 되었고(요3:1-10)
3)베드로도 사업에 실패했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두 배에 가득찬 고기를 잡았고(눅5:1-20)
4)나인성의 과부의 아들도 상여타고 갔지만 예수님 만나니 살아났습니다(눅7:11-17)
핵심은 내가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제가 잘아는 워싱턴의 어느 한인회장 / 한국 이명박 선거 /만나야 문제 해결
소경들은 그리스도의 표적 행하시는 소문을 이미 듣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소경이었으나 귀머거리 아닌 것이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귀로 듣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던 것입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영의 귀가 열리는 축복의 있기를 소원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소경들은 간절한 마음이 불타서 소리 지르며 뛰쳐 나섰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꾸짖고 잠잠하라 하되 이를 극복하고 나섰습니다. 우리 모두 환경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부르짖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을 때 주님을 만나며 만남이 곧 축복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믿되 끝까지 따르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소리쳐 간구하는 기도생활을 통해 응답 받고 주님 만나는 경험속에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안계수 목사
아름다운감리교회
  Cate: 2008년도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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